신승준의 시편들을 살펴보면, 「이순耳順」에서 시적 화자 ‘나’는 플러스만 가득한 삶이란 없음을, 마이너스를 껴안을 때 비로소 삶이 바로 서고, 세상이 완성된다는 깨달음에 도달한다. 그러한 ‘시간’ 또는 ‘나이’가 바로 ‘이순’이다. 「늙어 간다는 것」이 주목하는 테마는 ‘청춘(靑春)’과 대비되는 성격을 지닌다는 점에서 부정적이지만 ‘지혜’라는 강력한 무기를 가진다는 점에서 긍정적이기도 하다. 삶에서 시간 또는 세월의 축적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님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시이다. 「기다림의 의미」에서 ‘당신’을 향한 ‘나’의 기다림은 ‘실망’이나 ‘체념’ 또는 ‘후회’가 아니라 ‘새로운 의미’로 수렴한다. ‘새벽달’을 바라보며 “온밤을 새웠던 기다림”이 “온전히 별이 되어/ 하나둘 이 골목을 채워”간다는 이 시의 진술은 숭고미(崇高美)를 깨운다. 「회복기의 기억」은 시간이 지나간 뒤에 남는 ‘기억’에 집중한다. 시인은 ‘기억의 흔적’에서 ‘선홍빛 상처’를 발견한다. 이 시는 우리가 언제까지나 상처에 매몰되어서 살아갈 수 없음을 보여준다. “무심히도 새살이 돋는” 것, 천연덕스럽게 회복하는 것이 삶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른다 흐르고 흘러 쓸고 간 자리에 희미한 기억만 남는다
그 기억의 흔적에는 선홍빛 상처가 선명하다
살아 있는 날이 줄어들수록 되살아나는 그 기억을 고요가 덮고, 적막이 억누르고, 깊이깊이 묻어두었다 할지라도 그 상처 밑에서는 무심히도 새살이 돋는다 ―「회복기의 기억」 전문
‘시간’은 인간의 삶에서 본질적인 요소 중 하나이다. 시간은 늘 움직이는 속성을 갖고 있기에 한곳에 머무르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간 뒤에 남는 것은 ‘기억’이다. 시인은 ‘기억의 흔적’에서 ‘선홍빛 상처’를 발견한다. 우리는 생(生)의 궤적에서 비롯되는 기억에서 때때로 깊은 상처를 포착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겠다. 기억이라는 이름의 저장소에 흔적을 남기는 경우 중 하나가 상처이다. 불행이나 우울 또는 절망이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는 상처는 “살아 있는 날이 줄어들수록” 더욱 강렬하게 “되살아”날 수 있다. 모래시계의 모래가 줄어들 듯 삶은 탄생의 순간부터 조금씩 죽음을 지향한다. 사람들은 ‘고요’나 ‘적막’이라는 이름으로 간혹 ‘시간’이나 ‘기억’ 또는 ‘상처’를 감추거나 다독인다. 긴요한 것은 우리가 언제까지나 상처에 매몰되어서 살아갈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무심히도 새살이 돋는” 것, 천연덕스럽게 회복하는 것이 삶이기 때문이다.
책속에서
신승준 시인은 부처를 보았다는 전설이 있는 견불산見佛山 자락 견불리에서 구도의 정신으로 일상의 삶을 사랑하며 시를 쓰고 있다. 신승준 시집 『이연당집·하』의 시편들은 앞서 나온 『이연당집·상』보다 평범하면서도 단순한 시어로 화조지화花鳥之和를 꿈꾸며, 구도와 연연戀戀이 그윽한 산수화를 선보인다. 전편의 아름다운 서정시를 넘어서 오히려 평이하게 쓰인 시편들은 삶이라는 현실을 더욱더 끌어안으면서, 시의 정신이 향하는 건 묵언 수행자처럼 하나의 나무로서 오롯이 살고 싶어하는 구도의 자세라 할 만하다. 그리하여 그는 흐린 세상을 통하여 “보지 않고도 아름다움을 느끼”(「실명」)며, 그의 마음을 “꼭 닮은 견불산 산빛을 마주하고”(「누옥지복陋屋之福」) 싶은 것이다. 한편, 그는 구도의 여정에서 길항하는 세속의 사랑과 마주하며, 대상의 부재에 대한 그리움 절절한 연서를 보낸다. 이 사랑은 대체적으로 회고적이지만, 그가 집중하고 있는 구도의 정신과 맞물리면서, 사랑은 하나의 동력으로 작동하고 있다. 사랑의 흔적엔 선홍빛 상처가 선명하 더라도 “그 상처 밑에서는/ 무심히도 새살이 돋는”(「회복기의 기억」) 것처럼, 구도와 사랑은 하나일 터. 그러므로 앞으로 다가올 시의 여정에서 구도와 사랑을 꽃피울, 새롭게 태어날, 그의 시편들이 기다려질 뿐이다. -김영탁(시인·『문학청춘』 주간)
1부 이연당부怡然堂賦
순례를 떠나며
항해는 끝났다 잠시 휴식을 위해 배는 항구에 정박한다
긴 여정에서 함께했던 눈 부신 햇살 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던 미풍 방향각을 알려주던 무수한 별 이 모든 이들에게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길지 않은 휴식이 끝나면 다시 길을 떠난다 그 길은 순례 햇살도, 미풍도, 별도 없는 철저한 혼자만의 길이다
목적은 있으나 목표는 존재하지 않는 오롯한 순례의 길 내 길이 끝나는 날 그 길도 끝나겠지
이순耳順
나이가 삶의 영광도 세월의 벌도 아니라지만, 귀가 세상의 이치를 따른다는 이순, 육십 년의 세월을 살았다
이제야 세상이 눈에 들어오고 참된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러나 새벽에 보았던 영롱한 초로草露도 아침 햇살에 사라지듯 평생 참이라고 믿었던 그 수 많은 명구名句도 한낱 티끌과 같이 흩어지고 우리는 또 침묵의 밤을 맞이한다
육십 평생 나를 성가시게 하던 사사망념邪思妄念에 쫓기어 그 굴레의 의미마저 의심하였건만 이 세상은 그들까지도 존재해야만 비로소 완성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니 나도 이제 이순임이 분명하도다
농부, 봄을 깨우다
봄은 농부가 깨운다 그게 농부가 할 일이다
봄! 만물이 생동한다 한들 농부가 깨우지 아니하면 어찌 시작될 수 있으랴
농부를 천하의 대본이라 함은 시절의 근본인 봄을 깨우기 때문이리라
지금 이 시간
폭풍 같은 망념妄念과 갈등의 시간이 지나간다 저만치 밀려갔다 다시 해일처럼 밀려온다 인간의 의지는 배반당하고, ?침묵만이 지배하는 무언의 시간으로 안거安居에 든 수도승이 되어 축소된 백 일로 견성見性에 이른다
수없는 곡절을 겪으면서도 정점을 향하여 무거운 발걸음을 옮긴다 격정의 클라이맥스는 초라한 자유에 절규하고 ?파도에 밀려 산산이 부서지는 모래 같은 시간이 지나간다 - 인생
늙어 간다는 것?
속절없이 가는 청춘이 아쉬워 그 한 자락 떼어내 감춰 두었다가 오는 황혼 끝에 슬쩍 붙여 놓으려 했더니 야속한 세월 어찌 알았는가 뒤돌아온 세월에 머리에는 하얀 꽃이 만발하네
막을 수 없는 세월이라면 늘어나는 백발만큼 만이라도 늙은이의 지혜로 세상을 보게 하소서?
누옥지복陋屋之福
세상사, 제 뜻대로 되는 일 있을까마는 늙어 마지막 한 가지 내 뜻대로 하리라 호사수구狐死首丘라 하지 않았던가 떠날 때 떠날 수 있으니 아쉬울 것 없구나
이곳에 이런 친구도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골바람 맞으며 산모퉁이 돌아서면 내 마음 꼭 닮은 산빛과 마주하고
해 떨어져 들어서는 토방에는 그윽한 차향茶香과 함께 해변에서 찾아오는 파도소리 벗하며 노변정담爐邊情談 나눌 수 있으니 이만한 복락이면 족하지 아니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