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기쁘게 외로워져야겠다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해 맛있는 악수 3월 음각 실면증 자가면역결핍증 자화상 빗방울 점자 소란 면-시각장애인용 컴퓨터 화면 속 이야기 송화 코스모스 조락 이름 없는 꽃
2부 막 개봉된 아침 민 등잔 그들의 하늘 모란공원 민주열사 묘역에서 승화원에서 참신 구월동 모래내시장 오래된 골목 조등 싸락비 푸른 나뭇잎 주먹 당신의 허벅지 절정
3부 긴 어둠을 삼키고 삭혀 살구나무 선산에 살구 봄이 오는 소리 강 저녁놀 딱딱한 소리 방석 대보름달 목침 대숲 댓거리 밥상 문자메시지 한 통 왕곱빼기 짜장면집 성년식 성혼식
4부 빛이 오면 어둠이 머물렀던 자리를 빛에게 내어주듯 나무숟가락 부석사 뒤란 입춘 스미다 춤 베췌증후군 광부 섬 국지성 호우 롤러코스터 녹차나무 한 그루 소나기 수목장 보성고사우르스
해설 우리의 이름을 만지는 꽃잎들은 모두 눈부신 어둠에서 왔다 -김학중(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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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책소개
깊은 어둠의 세계 속에서 건져 올린 빛의 시(詩)
걷는사람 시인선 40번째 작품으로 손병걸 시인의 『나는 한 점의 궁극을 딛고 산다』가 출간되었다. 2005년 부산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한 손병걸 시인의 네 번째 시집이다. 그는 첫 시집 『푸른 신호등』에서 “두 눈을 잃고 시가 왔다”(‘시인의 말’)라고 말하면서, 어둠 속에 갇힌 삶을 토대로 자신만의 시세계를 일궈 왔다. 그런 시인이 4년 만에 더욱 깊은 시선으로 새 시집을 펴낸 것. 손병걸 시인은 어느 날 중도 실명으로 시력장애 1급 판단을 받는다. 덜컥 “햇볕은 따뜻한데/사방을 둘러보니/온통 뿌”연 세계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그 후에는 “걸음마다 달팽이관이 뜨겁고/가쁜 호흡이 점점 더 벅차 올 때/빌딩 숲속에서 희멀건 먼지가 일고/으깨진 소음이 길바닥을 뒹군다”(「자화상」)고 진술할 만큼 그는 주로 청각과 후각에 의존하여 세계를 인지하게 된다. 그의 목소리가 발화되는 시작점이 어둠이기 때문이다. 볼 수 없음으로 인해 역설적으로 더욱 진실을 볼 수 있게 된 것이 아닐까. “피돌이가 멈춘 듯 어둠이 밀려온다 몸속에 수분이 말라 간다”와 같이 뼈저린 통증을 감내하면서 “눈에 보이는 것이 없으니/해야 할 말도 없어야 한다는 듯/……/지극히 당연한 문장들이 몸속에서 끓어오를 때마다/나는 한 움큼의 알약을 삼켜야 한다”(「베췌증후군」)며 온몸으로 생을 견뎌낸다. 하지만 그는 절망적일 것 같은 상황 속에서도 결코 가벼운 감상이나 우울함에 그치지 않는다. 그의 시적 상상력과 사유는 한순간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것들은/없는 것이라고/쉽게 말들을 하곤” 하는 이들이 있지만, 그는 “창을 연 건/언제나 투명한/저 바람의 손끝”이라 인식하며 누구보다 날선 피부의 감각을 지니고 있다. 그리하여 “엎드려 기도하듯/낮게 임하신/향기가 짙은” 꽃 한 송이를 보고, “더 기쁘게/나 외로워져야겠다”(「이름 없는 꽃」)라며 본인에게 심심한 위로의 말을 건네기도 한다. 어둠 속에서 시의 자유를 찾은 손병걸은 순도 높은 언어로 세계를 포옹하고, 이웃들과 연대하며, 그렇게 쓰여진 시로써 비가시적인 가능성을 가시화하는 힘을 발휘해낸다. 이정록 시인은 손병걸의 시 작업을 “칠흑의 감옥 속으로 비류직하飛流直下하여 빛의 언어를 캔다”고 표현하며 “시력을 잃고, 그 불행 속에서 시의 뿌리돌기를 얻었다”고 평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시인 손병걸이 “별똥별을 캐는 광부”가 되어 우리에게 “찬란燦爛한 불꽃과 처연凄然한 얼음이 한통속”인 시를 선사하고 있다고 찬사를 보낸다.
책속에서
순식간에 내 안으로 스며들어 와 어둠을 밝혀 준 당신
나는 행여나 당신이 떠날까 봐 긴 시간 문을 걸어 잠갔다 그러나 당신은 굳게 닫힌 시건을 풀고 행선 모를 바람이 되어 사라졌다
허공만 더듬는 오늘 아침 문득 서로 어루만져 온 희로애락의 문양이 손끝마다 새겨진 등고선 같아서 높은 산, 바람이 소용돌이를 치듯 내 몸을 통째로 흔든다
시리고 뜨겁고 크고 작고 가볍고 무거운 바람 저 숱한 바람은 누구에게나 보이지 않듯 시력이 없는 내 눈앞에서도 멀쩡히 불고 사방이 막힌 공허에도 당신이 거푸 분다 뜨겁게 분다
끌어안은 심장, 언어의 마음, 그리고 나부끼는 머리칼 차분한 눈길, 손목, 그 체온, 부드러운 목소리 해맑은 표정, 발목, 하얀 목덜미, 달콤한 키스 이제야 온전히 알겠다 한 몸이란 시간이 엉켜 온 체위가 아니다
소리 소문 없이 내 몸을 빠져나간 당신이 산 너머 먹구름 속으로 스민다 해도 텅 비어 버린 내 몸속을 휘도는 바람은 분다 열 손가락 끝에 음각된 순간 내 안으로 불어닥친 그 환한 태풍은 ─「음각」 전문
우르르 쾅쾅, 천둥 소리에 깜짝 놀라 떨어뜨린 점자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