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를 배경으로 한 역사추리소설 《천 년의 침묵》을 시작으로 ‘신’의 존재에 의문을 던진 《신의 마지막 아이》, 한국전쟁의 상흔을 돌아보는 《못찾겠다 꾀꼬리》까지… 하나의 장르에 국한되지 않는 선 굵은 작품 세계를 선보인 이선영 작가가 신작 《지문》으로 돌아왔다. 산에서 발생한 변사 사건의 범인을 찾는 추리소설의 외피 아래 가정폭력, 아동학대, 대학 내 성폭력 등 가정과 사회에 만연한 폭력을 해부하듯 들여다본, 우리 사회의 자화상 같은 소설이다. 경기도 가평의 청우산에서 한 여자가 변사체로 발견된다. 언뜻 실족사나 자살로 보이는 현장. 그러나 사건을 맡은 백규민 형사는 석연치 않음을 느끼고 타살 가능성을 염두에 둔다. 사망자 오기현의 언니인 윤의현은 규민에게 동생이 자란 꽃새미 마을을 조사하라고 조언하며, 그곳 유지인 기현의 의붓아버지가 범인이라고 암시한다. 한편, 의현이 시간강사로 출강하는 대학교에서 작은 파문이 인다. 학생들을 성추행한 교수가 복귀한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 의현은 성추행을 폭로한 학생들을 도우려 하지만 학생들은 의현을 믿지 않는데…. 수사를 진행하던 규민은 서로 무관해 보이는 사건들이 실은 하나의 연결고리로 묶여 있음을 직감한다. 과연 변사 사건의 진상은 무엇일까. 마침내 모든 것이 밝혀졌을 때 그들은 진실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을까?
가정폭력, 아동학대, 대학 내 성폭력… 우리는 폭력의 한가운데를 살았으나 끝내 함께 살아남지는 못했다
단풍이 흐드러진 가을날, 가평의 청우산에서 시신 한 구가 발견되며 소설은 시작된다. 서울 광역수사대 소속이었다가 가평으로 발령받은 백규민 형사가 사건을 맡는다. 사망한 지 열흘은 넘은 듯한 시신은 부패된 채 빗물에 엉켜 있었다. 바위 위에서 발견된 신발이며 잘 접힌 유서 등 모든 정황이 자살을 가리키지만 규민의 직감은 사건의 심연을 들여다볼 것을 종용한다. 한편, 동생과 연락이 끊어져 실종신고를 한 윤의현은 인상착의가 비슷한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연락을 받는다. 규민은 사망자 신원을 확인하러 온 의현을 보고 그녀 역시 자신처럼 상처받은 사람임을 직감한다. 같은 시기, 소설가인 의현이 출강하는 대학교에서 학생들을 성추행해 물의를 빚은 교수가 다음 학기에 복귀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파문이 인다. 의현은 성추행 사실을 폭로한 학생들 편에 서지만, 학생들은 의현을 믿지 못한다. 상처받은 형사, 진실을 은폐한 마을, 성폭력 사실을 덮으려 하는 대학교, 비밀을 품은 자매의 삶. 별개의 사건들이 하나로 귀결됨을 직감하는 순간 규민은 경악하고 마는데…. 이들이 서로 다른 목소리로 말하는 진실은 과연 어디로 향하고 있을까?
《지문》은 1억원 고료 ‘대한민국뉴웨이브문학상’을 수상하며 데뷔한 작가 이선영의 다섯 번째 장편소설이다. 전작을 통해 증명된 이선영 특유의 속도감은 추리소설이라는 형식을 입어 한껏 빛을 발한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틀에서 한발 물러나 힘의 구도를 조망하는 시선은 섬세해서 더 잔혹하다. 서로 무관해 보이는 진실의 단편들이 하나의 퍼즐로 완성되는 순간, 독자는 숨 쉴 틈 없이 결말로 내달리게 될 것이다.
《지문》에서 살인, 성추행, 아동학대만큼이나 무겁게 다뤄지는 또 다른 죄가 있다. 바로 무관심이다. 내 일이 아니니 모른 척하고, 힘 있는 자 앞에서 비굴해지고, 때로는 알고도 못 본 척 눈감는 ‘침묵의 죄’가 이처럼 생생하게 그려진 소설이 또 있을까.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은폐된 진실은 반드시 돌아와 침묵의 대가를 요구한다는 것을. 이선영은 ‘작가의 말’에서 “지금도 음지에서 이 책의 인물들과 동일하거나 비슷한 폭력에 시달리며 숨죽이고 있을 많은 이들에게 이 책이 작은 용기가 되길 바란다”고 소회를 밝혔다. 그들의 죄와 벌이 궁금하다면 지금 소설 《지문》을 펼쳐보자.
책속에서
[P.11] 변사자의 키는 대략 160에서 165센티미터 사이로 보였다. 나이는 30대 초중반쯤. 포니테일을 푼다면 숱이 많고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일 것이다. 복장은 긴팔 블라우스에 회색 정장바지 차림이다. 변색되긴 했지만 블라우스 색깔은 원래 인디언 핑크였을 것으로 짐작되었다. 얼굴에는 풀과 같은 얇은 막이 덮여 있었는데, 사체가 부패하면서 생긴 분비물이 빗물과 엉킨 듯 보였다. 신발은 신지 않았고, 살구색 발목스타킹은 복숭아뼈 부근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오금팽이에서는 진물이 흐르고, 눈과 코와 입에서도 구더기와 이름 모를 벌레들이 꼬물거렸다. 핏자국이 흙바닥과 수풀, 돌멩이 사이에 거뭇하게 남아 있는 걸로 보아 사체에서 흘러나온 피의 양이 짐작되었다.
[P. 26] 범행 수법이 날로 악랄해지면서 범죄자들은 자신들의 지문을 없애는 수술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지문을 지우려는 범죄자들의 집착이 무색하게 지문을 완전히 없애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중략)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손가락이 너덜너덜해지는 걸 감수하고 진피층까지 깎아버리면 된다. 아니면 손가락 마디를 잘라버리든지.
[P. 94] ‘서사창작실기론’ 수업이 있는 금요일이 왔다. 스물다섯 명 모두 강의실에 들어가지 않았다. 금요일이 지났지만 잠잠했다. 학과사무실에서도 연락이 없었다. 이민흠이 발설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도 켕기는 게 있었던 모양이다. 그다음 금요일에도 학생들은 수업을 거부했다. 담당 조교가 예나에게 연락을 해왔다. 예나는 조교에게 이 수업 거부가 단체 의사 표시라고만 전했다. 조교는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예나는 교수님이 더 잘 아실 거라면서 전화를 끊었다. 수업 거부 3주째가 되자 몇몇 학우가 이제 그만하자고 의견을 내놓았다. 그즈음 이민흠이 예나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날 술자리에서의 사건은 취한 탓이었다고, 계속적인 수업 거부는 학생들에게 불이익을 줄 것이라고 못박았다. 예나는 단톡방에 이민흠의 문자를 공유한 후 그에게 답장을 보냈다. 불미스러운 일을 술 탓으로 돌리는 교수님의 태도가 몹시 유감스럽다고, 학과에 정식으로 이의를 제출하겠다고 했다. 답신은 없었다. 수업 거부 중인 학생들 중 몇몇은 이민흠에게 창작한 소설을 개인적으로 보내기도 했다. 무엇보다 1학년인 학생들은 앞으로도 3년 넘게 이민흠을 전공 교수로 만나야 한다는 부담감이 컸다. 이민흠이 졸업논문 지도교수가 될 확률도 높았다. 당장 이번 여름방학에 그가 소개한 출판사에서 인턴으로 일하기로 예정된 학생도 여럿이었다. 장차 대학원에 진학하거나 등단을 목표로 품은 학생도 있었다. 예나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러니 학생들도 마음을 졸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