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생은 처음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이 구절을 조금 변형한 말들도 여러 번 들었다. ‘처음’이란 말에는 모르는 것에 대한 낯설음과 두려움이 담겨 있다. 혹은, 실수할지도 모른다는 예고와 더불어 너그럽게 봐 달라는 부탁도 담겨 있는 듯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처음’이라는 것에 대한 궁금증과 호기심, 기대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처음으로 겪는 생이니, 얼마나 신기한 일들이 많을 것인가. 낯설음과 두려움. 궁금증과 호기심. 기대감과 희망. 이런 것들이 ‘처음’인 것에 대한 사람들의 대체적인 반응이다. 반면 익숙하고 낯익은 것들은 그냥 지나쳐 버린다. 사람들은 알고 있는 것은 관성으로, 습관적으로 대하고 어림짐작으로 넘겨 버리고 만다.
이런 우리가, 세상에서 가장 낯선 존재를 보며 익숙하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바로 ‘가족’이다. 세상에서 가장 낯설고, 처음으로 겪어 보는 이들이야말로 ‘가족’이 아닌가. 이번 생도 처음이지만, 나의 가족도 처음이다. 세상에 이런 아버지, 어머니도 처음이고. 이런 형제, 자매도 처음이고. 이런 아들, 딸도 처음이다. 그들은 참으로 신기한 존재들이다. 생각해 볼수록 신비롭고, 또 신기한 인연이다.
가족은... 태어나자마자 부대끼며 살아야 했기에 익숙하게 받아들였다. 늘 집에서 만나는 사람들. 같은 공간에 없어도 어딘가 나에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존재들. 그들에 대해 훤히 잘 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나는 그들에 대해 모른다. 잘 모르는 것 같다. 부모가 어떻게 서로를 만나, 가족을 꾸리며 살아왔는지. 나의 형제, 자매는 왜 이리도 나와 비슷한 생김새에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 나에게서 나온 자식은 또 왜 이리 나와 생각이 다른 것인지. 하나도 모르는 듯하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가족은 참으로 색다르고 처음 겪어 보는 존재들이다.
인연... 처음으로 만나는 타인... 낯선 이별... 그 원초적 뿌리, 감춰진 줄기의 시작은 역시 ‘가족’이다.
그리하여 ‘인연’ 시리즈 두 번째 책은 가족에 대한 이야기로 채워진 듯하다. 가족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익숙한 존재가 아니며, 또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도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들은 알려 준다. 여기 실린 소설처럼, 낯설고 갑작스럽게 나타난 존재이며, 함께 살았으나 잘 몰랐던 존재들일 뿐이다.
그러므로 여러분들도 이 책을 읽으며, 가족에 대한 생각이 조금이나마 달라지길 바라 본다. 혹은, 그들을 조금 낯설게 봐 주길 바란다. 그 인연의 신비로움을 알아보게 되길 바란다.
가장 익숙한 얼굴에서 발견하는 가장 낯선 모습... 그 신비한 아름다움을 느껴 보게 되길......
나에게 온 가족, 나와 이어진 가족에 대한 인연의 이야기
책속에서
“전부 그렇다는 말이 아니잖아. 어떤 말도, 모든 경우에 해당되지는 않아. 어머니가 있어도 아이를 싫어할 수도 있고, 방치할 수도 있어. 어머니가 수호신이 아니라, 악마 같은 집고 있을 거고. 아동 학대 사건을 봐. 얼마나 많아... 너무 자기 연민에 빠지지 마. 세상에 너보다 힘든 일을 겪는 사람도 많으니까. 인생은, 어머니란 존재 하나로 천국이 될 만큼, 녹록지 않아.” 해인이 흥분하는 바람에 우연도 휩쓸리듯 남편의 말까지 빌어 대꾸하고 말았다. “그게 아니야, 우연아. 어머니가 있는 집이 천국이고, 세상의 모든 집이 천국인데 나만 지옥에 있다는 게 아니야. 그렇게 과장할 생각 없어. 엄마도 없으니 얼마나 불쌍해. 나 좀 동정해 줘.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라니까.” 친구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게 아니야. 그런 말이 아니야. 어머니가 있는 집은 알록달록 색이 칠해져 있고, 우리 집은 무채색이었다는 얘길 하는 거야. 똑같은 세상인데, 완전히 달라. 남들은 자꾸만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해. 너무나 쉽게 그런 말을 해. 별 차이 없어. 별 거 아니야. 더 불행한 사람도 있어, 더 불쌍한 사람도 있어. 그게 아닌데. 내가 불행하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닌데. 단지 모르겠다는 말을 하는 것뿐인데... 어머니의 사랑이, 진짜 사랑이 어떤 건지 모르겠어. 그래서 진짜 사랑을 받아 보고 싶었어.
- 1 낙산사 홍련암 - 진짜, 사랑을 찾다
문은 세계를 이어 주는 통로라는데... 그것은 게임을 하다 터득한 이치였다. 게임은, 하나의 레벨에서 다음 레벨,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가려면 대부분 문을 통과해야 했다. 어찌 보면, 괴물과 싸우고 레벨을 올리고, 이런 것들이 오로지, 문을 열기 위한 과정인지도 몰랐다. 그리고 난관이 크면 클수록, 더 큰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문이 열렸다. 그러나 이 문은 고시원에 딸린 객실의 문이었다. 냉혹한 현실의 문. 그것을 넘는다고 해서, 결코 레벨이 올라가지는 않을 문. 건너편은 휑한 방뿐이라는 것을 알지 않는가. 아무리 어렵게 문을 젖히고 들어가도, 서너 평 남짓한 방과 화장실 한 칸이 전부일 뿐. 살림이라고는 미니 냉장고와 텔레비전, 2단 서랍장이 있고. 그에 더해, 이불 세 채와 옷가지들, 간단한 먹거리가 담겨 있는 사과 박스, 그릇 몇 개와 김 노인 몰래 감춰 둔 휴대용 가스버너가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무엇을 감추고 있는지, 문은 시치미를 뗀 채, 버티는 듯했다. 잠시 문을 노려보던 청연은 호흡을 가다듬은 후, 재차 달려들어 문짝을 위로 들어 올렸다. 문이 들렸는지 모르겠지만 악이 받쳐 대고 몸으로 밀어붙였다.
- 2 선운사 참당암 - 낯선 문을 열다
버스를 기다리며 주차장을 돌아보니, 참으로 대단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두 사람 다 난생 그런 구경은 처음이었다. 주차장에는 이미 관광버스가 열 대 가까이 두 줄로 정차해 있었다. 그리고 관광버스를 타고 온 승객들이 동그란 간이 탁자에 둘러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린 수백 명의 사람들은 대부분 회색 법복을 입고 있었다. 원래 아는 사이들인지, 보살 같은 여인들은 식탁을 차지하고는 웃으며 식사 중이었다. 식사가 끝난 테이블이 있으면, 버스 앞에 대기 중이던 기사들이 냉큼 달려가, 테이블 위의 쓰레기를 깨끗이 쓸어 버렸다. 그리고 횟집 테이블에 덮는 것 같은 얇은 비닐을 걷고, 동그란 상판과 다리를 접어 버스 아래 짐칸에 넣었다. 켜켜이 포개 놓은 파란 의자들도 함께 짐칸으로 사라졌다. 그 과정이 아주 자연스럽고 익숙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모두 이런 여행이 몸에 익은 듯, 승객들도, 기사들도 일사천리로 움직이고 있었다. 인섭과 강 회장은 그 광경이 마냥 신기했다. 그리고 어느새 인섭은 그들 속에서 아내를 떠올리고 있었다. 처음엔 여인들을 구경할 뿐이었으나 나중엔 그 속에 부인이 있는 양, 저도 모르게 부인을 찾고 있었다. 그러다 낯선 여인과 눈이 마주치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저렇게들 단체로 오는구만.” 강 회장도 기가 질린 듯 겨우 한마디 했다. 그는 단체로 버스를 타고 온 여인들이 마치 전장에 나가는 장수처럼 기개가 늠름하다고 생각했다. 하긴 그들의 합장한 두 손에... 아들의 결혼이며, 딸의 취직이며, 가족의 건강과 행복이 모두 달려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