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진과 행적으로 만나는 박태준의 생애와 정신 아버지의 ‘고무옷’·10 |‘조센징’의 나침반·12 청년 박태준의 재산·14 | 건국에는 건군이 있어야·16 가슴에 달린 채무증서들·18 | 맞선의 대화·21 부패의 늪에 외나무다리를 놓다·23 | 미국 연수·28 처음으로 ‘경제’와 만난 1961년 초가을·30 | 산업 현장을 뛰어다니다·33 녹색혁명의 출발지점에서·36 | 큰 바위의 무게로 일본열도를 훑다·39 “정부나 여당의 간섭은 안 됩니다”·43 | 한국 최초 세계챔프의 후견인·46 KISA의 함정과 포항종합제철(POSCO) 창립·48 | 황량한 모래벌판의 롬멜하우스·53 “제철소가 되기는 되는 건가”·56 | 회사 청산 준비와 ‘하와이 구상’·58 모스크바대학 총장의 ‘쓰라린 감동’·61 | “내가 이 땅에 태어난 뜻이다”·62 ‘하와이 구상’에 대한 반박이나 트집은 틀린 것이다·66 ‘우향우’의 제철보국·78 | 내민 적 없는 종이마패·81 단군 이래 최대 역사(役事)의 두 레일·84 | 중후판공장과 포철의 첫 제품 출하·86 리베이트로 만든 공익재단과 교육보국·89 | 열연비상·94 꽁초파일과 볼트 24만 개·97 | “나왔다! 나왔다!”·102 기적의 기반이 만들어지다·104 | 제강사고와 안전의 날·106 나의 사전에 부실공사는 없다·109 | “철강은 기초산업, 하나의 회사가 맡아야”·112 철인(鐵人)처럼 철에 파묻힌 한국경제의 주역·115 영일만의 기적, 그 리더십의 요체·118 덩샤오핑, “박태준을 중국으로 수입하면 되겠다”·121 | 자주관리를 강의한 그날에·124 포스코의 울타리가 되는 길·126 | 한스 브링커를 떠올린 여름날의 특별지시·130 미국 진출의 교두보 만들기·134 | 포스텍은 세계 일류 연구중심대학으로·138 “내가 한국의 박태준을 몰랐을 뿐”이라는 자페·142 | ‘포철주 장외 매각’을 막아내다·145 철강의 노벨상 ‘베서머 금상’을 받다·147 | 이병철과 박태준·150 카네기와 박태준·153 | ‘전업 정치인은 되지 않겠다’는 여당 대표·158 영혼으로 마시는 한 잔의 감로수·162 정보통신사업에 매년 1조씩 10년간 투자하겠다·165 다음 세기의 번영과 다음 세대의 행복을 위하여·168 절대적 신뢰에 응답하다·172 | 육필의 사임서를 내다·176 자연의 법칙은 신도 바꿀 수 없다지만·180 | “어머니, 불효자가 왔습니다”·182 주역 두 사람이 빠졌던 국가적 경축행사·184 | ‘만남’ 앞에서 44년 만에 해후하다·186 ‘겡제’는 가라, ‘경제’가 왔다!·191 | 산업화세력과 민주화세력의 화해, 그 디딤돌·193 IMF사태의 교훈, “우리 정치가 달라져야”·196 | IMF사태를 수습한 뒤·198 “독재의 사슬도, 빈곤의 사슬도 기억케 하라”·202 『박태준 평전』 번역 출간과 특별강연·205 “평양에 가서 코치도 했으면 좋겠어”·208 퇴직 직원들과 19년 만의 재회, 마지막 연설·210 짧은 인생을 영원 조국에·213 | 강철거인·교육위인, 겨울에 떠나다·216 박태준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219
2. 황혼기의 연설에서 박태준정신을 되새기다 자연의 법칙은 신도 바꿀 수 없다지만 이 무정한 사람아·224 한일국교정상화 40주년에 부과된 21세기의 시대적 요청·228 젊은 세대의 시대적 좌표와 엘리트의 길·239 우리의 추억이 역사에 별처럼 반짝이고 있으니·248
3. 학자의 눈, 작가의 눈으로 박태준정신을 탐구하다 특수성으로서의 태준이즘 연구_송복·254 천하위공의 길, 박태준의 길_이대환·298
“철강산업을 일으켜 국가건설의 초석이 되겠다. 그것이 내가 이 땅에 태어난 뜻이다.” “우리 세대는 다음 세대를 위해 순교자적으로 희생하는 세대다.” “교육이 일본에 앞서야 일본을 이길 수 있다.”
박태준 포스코 창업회장의 어록에 나오는 말이다. 그의 정신과 신념이 함축돼 있다. 2011년 12월 13일 향년 84세로 서거한 박태준은 41세(1968년)부터 65세(1992년)까지 사반세기 동안 언행일치와 솔선수범의 리더십으로 포스코를 세계 최고 철강기업으로 우뚝 세우는 가운데 국내 최고 수준의 14개 유‧초‧중‧고교와 세계적 연구중심대학 포스텍을 설립·육성함으로써 생전에 자신의 말을 실체적 위업(偉業)으로 이룩했다. 그의 삶에서 필생의 사상적 두 축이 되었던 ‘제철보국’과 ‘교육보국’을 실현한 것이었다.
“산업화세력과 민주화세력의 화해, 영남과 호남의 화합은 우리에게 맡겨진 미룰 수 없는 시대적 과제다.” “포스코가 원산에 제철소를 세워 북한의 국가기간산업을 안정화시키고 평양에 가서 경제개발 자문도 해주고 싶다. 같은 민족이니 북한 사람들도 능력은 우리와 같다.”
역시 박태준의 어록에 나오는 말이다. 인생의 황혼기였던 70세(1997년)부터 서거 때(2011년)까지 염원하고 추구한 소망이었다. 박태준은 우리 헌정사상 처음으로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룩해 한국의 민주주의 평가 지수를 선진국 수준으로 끌어올린 ‘김대중 정부’ 출범(1998년 2월)과 6‧25전쟁 후 최대 국난으로 기록된 외환위기사태(IMF사태)의 조기 극복에 크게 기여하면서 자신의 말을 실천하는 길로 걸어갔다. 하지만 현재의 정치적 지역감정이나 경색된 남북관계를 볼 때 그의 뜻은 후세가 극복해야 하는 시대적 비원(悲願)으로 남겨져 있다.
포항지역사회연구소(대표 이재섭)가 박태준 서거 10주기를 앞두고 추모도서 『박태준 생각』을 펴냈다. 지금 여기의 우리는 왜 ‘박태준 생각’을 생각해야 하고 왜 ‘박태준 생각’과 대화해야 할까. 편찬위원들은 “박태준 선생이 남긴 공적의 탑은 생각과 말과 행동의 삼일치가 만든 위업이다. 그러나 공적보다 더 중요한 가치는 그것을 성취하게 만들었던 선생의 정신, 고뇌, 투쟁이다. 이 무형의 가치를 제대로 알아봐야 하는데, 그것을 어떤 실체로 세우려는 출간 취지에 그 의미가 담겨 있다”고 말했다.
또한 포사연은 “지리적으로든 시대적으로든 가까운 거리에서 박태준 선생에 대한 정당한 칭송과 합당한 비판에 게으르지 않았던 우리가 이렇게 어지러운 세상에서 선생의 10주기를 기리는 일들에 나서는 것이 마땅한 도리이고 예의인데, 물론 『박태준 생각』이 전국적으로 널리 읽히게 되는 노력을 기울이겠지만, 지난 9월 14일부터 내년 1월 9일까지 열리는 포항시립미술관의 〈신화를 담다―꺼지지 않는 불꽃〉 전시를 찾아오는 분들이 이 책을 기념으로 오래 간직할 방안을 마련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박태준 생각』은 3부로 짜였다. 1부 ‘사진과 행적으로 만나는 박태준의 생애와 정신’은 출생부터 서거까지 일대기 전체를 66개 소제목으로 나누고 관련 사진 103장과 함께 행적과 어록을 간략히 간추려 연대기적으로 재구성하면서 이대환 작가의 <박태준 평전>에서 해당 시기에 대한 비평적 관찰을 발췌해 곁들였다.
2부 ‘황혼기의 연설에서 박태준정신을 되새기다’에는 김호길 포스텍 총장 10주기 추모사, 한일국교정상화 40주년 국제학술대회 기조연설, 국립하노이대학 특별강연, 그리고 마지막 연설로 남은 ‘퇴직 직원들과 19년 만의 재회’ 인사말 등을 실었다. ‘박태준 생각’을 따라가면서 ‘박태준 생각’과 진지하게 교감할 수 있는 기회이다.
3부 ‘학자의 눈, 작가의 눈으로 박태준정신을 탐구하다’에서는 송복 연세대 명예교수(사회학)의 논문 ‘특수성으로서의 태준이즘 연구’와 이대환 작가의 에세이 ‘천하위공의 길, 박태준의 길’을 통해 박태준정신의 진수를 확인할 수 있다.
책속에서
생존의 길을 찾아 일본으로 들어간 아버지의 뒤를 좇아 현해탄을 건너갔던 수많은 식민지 아이들 가운데, 사춘기를 벗어난 무렵에 해방된 고향으로 돌아와 빈곤에 허덕이는 신생독립국의 어른으로 성장한 다음, 유·소년기에 어쩔 수 없이 익혔던 일본어와 일본문화로써 가장 훌륭하고 가장 탁월하게 조국에 이바지한 인물은 박태준일 것이다. ―본문 중에서
1953년 여름, 한국전쟁이 휴전으로 멈추는 즈음에 멀쩡히 살아남은 한 청년장교가 자신의 영혼에다 조각칼로 파듯이 좌우명을 새겼다. ‘짧은 인생을 영원 조국에’, ‘절대적 절망은 없다’. 1977년 5월, 조업과 건설을 동시에 감당해 나가는 영일만 포항제철에서 절박한 목소리로 외치는 한 아버지가 있었다. “우리 세대는 다음 세대를 위해 순교자적으 로 희생하는 세대다.” 바로 그가 박태준이었다. 그리고 그는 도무지 낡을 줄 모르는 그 좌우명, 그 신념으로 삶의 길을 개척하면서 다른 쪽으 로 벗어나지 않는 일생을 완주했다. ―본문 중에서
1992년 7월 모스크바대학 총장 빅토르 사도노비치가 방문해 모든 주택이 사원들의 개인소유라는 설명을 듣고 눈시울을 붉히며 쓸쓸히 말한다. “레닌 동지가 꿈꾸고 추구한 이상향을 포스코에 와서 보았습니다.”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