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가 출신 성현(成俔)은 『용재총화』 [慵齋叢話]에서 “지금 문벌이 성하기로는 광주이씨가 으뜸” [當今門閥之盛 廣州李氏 爲最]이라 했습니다. 그것은 700여년의 종회 역사를 가진 우리 광이(廣李)가 수많은 인물들을 배출함에서였습니다. 그 가운데 600여년의 역사위에 있는 우리 좌통례공파 후손들 또한 파조이시며 비조이신 좌통례공을 비롯한 수많은 저명한 학자와 현달한 문관 및 무관을 배출함으로서 광이 명문가를 이룩하는데 하나의 축을 이뤄온 것이 사실입니다. 이에 따른 『반』의 후손 장령공 영부, 교리공 수경, 청백리공 중경, 통제사공 도빈, 총융사 경무공 우항, 충숙공 헌, 한성부좌윤 춘영, 훈련원정 동응, 『지』의 후손 석담공 윤우, 낙촌공 도장, 귀암 문익공 원정, 도헌공 박곡 원록, 정재공 담명, 교리공 한명, 현감공 기명, 묵헌공 만운, 『람』의 후손 이조참판공 영현 등이 그 한 예입니다.
예로부터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란 말이 있습니다. 자랑스러운 우리 죄통례공 후손들은 선조님들이 쌓아올린 찬란한 역사를 잊지 않고 선조님들의 행적을 거울로 삼아 미래로 나아가면서 무엇보다 중요한 우리 후손들 간의 단결과 화목-돈목을 기하기 위함이 이 자그마한 책자를 쓰게 된 동기였습니다. 본 책자를 통해서 좌통례공의 후손들이 조상의 행적을 익힘으로서 현재의 우리를 인식하면서 미래를 바라보는 한편, 조상의 노력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지님으로서 후손 간의 돈목과 화목에 일조가 되신다면 이 책자를 쓴 보람이 될 것입니다.
자손 된 자가 선조의 마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삼는다
우리 광이의 어느 선현(先賢)께서 “자손이란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유체(遺體)인 것이다. 그러므로 아! 자손 된 자가 선조의 마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삼는다면 이는 훌륭한 자손이라 말할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후손으로서의 우리 하나하나는 지구상의 어느 별개의 존재가 아닌 광이라는 동족 집단 속의 한줄기입니다. 이 때문에 우리 후손들은 그에 따른 자부심과 소속감 내지 연대감을 태생적으로 갖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광이는 둔촌선생께서 가문을 일으켜 세운 지 700여 년이라는 기나긴 역사를 면면히 이어오고 있습니다. 이는 모진 고통을 감내하면서도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단성(丹誠), 배고픔을 보람으로 삼는 청백리 정신, 자부심과 영광으로 가득 찬 ‘팔극조정’, 말을 꺼내기에도 끔찍한 각종 사화 연루 등으로 점철된 광이 역사 그 자체입니다. 그 같은 700년 역사의 한 줄기에 좌통례공 후손들이 광이 100년의 역사를 이어받아, 이후 600여 년의 역사 위에 무성한 가지를 뻗고 뻗어, 줄기차게 이어오고 있다는 것은 자부심을 갖기에도 충분한 문중 역사의 한 페이지라 하겠습니다.
또한 좌통례공 후손들은 경기도 남양주시와 경상도 칠곡 일원에 걸쳐 각기 집성촌을 이루어 대대로 현달한 후손들이 배출됨으로서 광주이씨 명문거족(名門巨族)으로서의 명성을 오늘날까지 누리고 있다는 것도 세상이 다 아는 사실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좌통례공파종회의 득래(得來) 도유사는 평소 조상의 역사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남달라, 본인과 만날 때마다 조상의 역사에 대한 소견을 서로 주고받는 사이였습니다. 그런 와중에 득래 도유사는 조상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말로서만 그치지 않고, 이 책자를 통해서 하나의 결실을 이룬 결과 비로소 현달한 좌통례공 후손들에 대한 행적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나왔으니, 이 책을 지은 득래 도유사는 앞서 말한 “자손 된 자가 선조의 마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삼은 것”이 된다.
책속에서
[P.53~55] 종2품 이조참판(吏曹參判) 겸 대사헌(大司憲) 청백리공(淸白吏公) 중경(重慶)은 장령공(掌令公) 영부(英符)의 둘째 아들로 1517년(중종 12년)에 서울 사직동에서 태어나 1568년(선조 1년) 52세의 나이에 졸서(卒逝)하였다. 청백리공 중경(重慶)의 배위는 증 정부인(贈-貞夫人) 무송윤씨(鵡松尹氏)이며, 배위는 증 정부인(贈-貞夫人) 파평윤씨(坡平尹氏)이다. 자녀는 1남 2녀로 아들은 항(恒)이다. 중경(重慶)은 형(兄)인 교리공 수경(首慶)이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함경도 온성으로 귀양 가기 몇 달 전 1546년(명종 1년) 4월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관직에 출사하여 홍문관(弘文館) 한림옥당(弘文館:翰林玉堂), 이조전랑(吏曹銓郞), 의정부 사인(舍人), 홍문관 직제학(弘文館 直提學), 사간(司諫) 및 대간(大諫) 등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역임한 후 정3품 예조참의(禮曹參議), 대사간 부제학(大司諫 副提學) 및 대사헌(大司憲-종2품)을 겸하며 이조참판(종2품-吏曹參判)에 이르렀다.
이조참판(吏曹參判) 중경(重慶)의 정치적(政治的) 시련(試鍊)을 살펴보면, 명종(1553년 명종 8년)이 20세가 되면서 어머니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이 막을 내리게 되자 독자적으로 왕권의 세력을 확보하기 위해 왕비 인순왕후의 외삼촌이며 호령대군의 5대손인 외척이며 왕손(王孫)인 이량(李樑)을 동부승지(同副承旨)로 특진시켜 명종의 곁에 두고 총애하였다. 명종(1561년 명종 16년)은 을사사화의 공신인 소윤세력(小尹勢力)의 윤원형(尹元衡)의 전횡을 막으려고 이량(李樑)에게 막강한 힘을 실어주게 되는데 이량(李樑)은 사류(士類)의 신망을 받는 생질, 심의겸(인순왕후 동생)이 신진사류와 연계된 것을 꺼림직하게 생각하여 심의겸(沈義謙)과 심강(沈鋼)마저 제거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명종의 처남인 심의겸과 심강(심의겸 부친)은 인순왕후를 통해 명종 왕을 압박하게 되고 결국 이량(李樑)이 제거되고 말았으며 명종의 후원과 총애를 받던 막강한 권력자 이량(李樑)은 심의겸과 심강 등의 세력에 의해 탄핵되어 1563년(명종18)에 유배되어 이량(李樑)은 완전히 몰락하게 된다. 이량(李樑)의 실각으로 중경(重慶)도 이량(李樑)의 일파로 몰려 심의겸 심강의 세력에 의해 파직되고 실세하게 된다. 중경(重慶)에게 정치적으로 혹독한 시련이 찾아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