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 56] 소녀는 씨익 웃더니 인파 쪽을 가리켰다.
“봐, 저쪽에 바이에른하고 리옹 오케스트라 예술 감독이 와 있어. 뮌헨에서 콘서트가 있어서 우연히 들렀대. 밑져야 본전이니 정기 연주회 솔리스트로 써주지 않겠냐고 타진하러 가볼래? 뮌헨 최고 순위 두 명을 세트로, 하루에 한 사람씩 어떠냐고.”
“뭐? 너하고 세트로?”
너새니얼은 얼굴을 찌푸렸다.
소녀는 콧방귀를 뀌었다.
“어쩔 수 없잖아. ‘우승자가 없다’는데, 세트 판매라도 해야지.”
너새니얼은 작게 웃었다. 그녀가 ‘우승자가 없다’고 프리드리히 하우저와 똑같은 목소리로 말했기 때문이다.
“좋아, 가볼까?”
소녀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_ 「사자와 작약」
[P. 83~84] 당연하지만 이 시기에 홉이 열려 있을 리 없었다.
열매는커녕 눈에 닿는 것은 전부 이랑, 이랑, 이랑.
황량한 토지가 펼쳐져 있다.
다만 이랑에는 가느다란 막대기가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
“그런가. 이게 녀석이 보던 풍경인가.”
저편에서 세찬 바람이 불어왔다.
이랑에 꽂힌 막대기가 파르르 떨렸다.
바람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어딘가 아련하게 봄 내음이 났다.
히시누마는 그 냄새를 가슴 한가득 들이마셨다.
불현듯, 또다시 「봄과 수라」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진실한 언어는 여기에 없고 수라의 눈물은 땅을 적시네)
그렇구나, 너는 여기에 있구나. 이 어딘가에서, 너의 소리를 듣고 있구나.
_ 「가사와 그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