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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정지상의 〈대동강시〉에 차운하여 _ 13
ㆍ백탑 _ 14
ㆍ태자하 _ 15
ㆍ망부석 앞에서 _ 16
ㆍ옹방강이 나의 초상화에 지어준 시에 차운하다 _ 17
ㆍ아들 팽석을 집으로 보내고 나서 _ 18
ㆍ동선관 눈 속에서 _ 21
ㆍ갑술년 새해 아침 _ 22
ㆍ곡산으로 돌아가면서 _ 23
ㆍ소동파의 생일을 기리며 _ 24
ㆍ아들 명준이 그린 소동파의 초상을 보며 _ 27
ㆍ상산의 여러 모습 _ 29
ㆍ한보정 _ 32
ㆍ춘천부사로 부임하여 _ 34
ㆍ맥풍 12장 _ 35
ㆍ청평동 어귀 _ 38
ㆍ고갯마루의 꽃 _ 39
ㆍ구송정 폭포 _ 40
ㆍ박연폭포 _ 41
ㆍ낚시터에서 달을 보며 _ 42
ㆍ나그네의 물음에 답하다 _ 43
ㆍ강호로 가겠다고 늘 말했지만 _ 44
ㆍ맑은 바람 오백 간 집 _ 45
ㆍ잡서 _ 46
ㆍ조구형의 죽음을 슬퍼하며 _ 57
ㆍ입춘날 눈이 내려 _ 58
ㆍ낙엽 지는 소리를 들으며 _ 59
ㆍ눈에 반쯤 묻힌 집을 그리고 싶어 _ 60
ㆍ아내의 죽음을 슬퍼하며 _ 61
ㆍ가을 장마 _ 63
ㆍ개성에도 자하동이 있어 _ 64
ㆍ진사 남상교의 시에 차운하여 _ 65
ㆍ다산을 만나지 못하고 _ 67
ㆍ섣달 그믐에 동파집에 장난삼아 차운하다 _ 68
ㆍ왕명을 받들어 당나라의 시를 뽑고 나서 _ 72
ㆍ홑잎 붉은 매화 _ 74
ㆍ우화노인의 《녹파잡기》에 쓰다 _ 76
ㆍ꽃을 찾아서 _ 82
ㆍ늦은 봄날 내리는 비를 보며 _ 84
ㆍ육십년 친구 영안부원군의 죽음을 슬퍼하며 _ 85
ㆍ내 시는 어느 시대 시인가 _ 86
ㆍ동파공의 적거(謫居) 삼적시에 차운하다 _ 87
ㆍ중양절에 광원과 술을 마시고 헤어진 뒤에 _ 90
ㆍ금령과 하상을 위하여 시를 논하다 _ 92
ㆍ귀양에서 돌아왔건만 그대가 없어 _ 97
ㆍ더위에 시달리며 _ 98
ㆍ결혼한 지 육십 년 다산을 축하하며 _ 100
ㆍ요즘 보혜와 선홍 두 스님의 편지를 잇달아 받았기에 _ 101
ㆍ숲속 정자에서 한가로워라 _ 102
ㆍ중양절을 맞아 도연명에게 화답하다 _ 103
ㆍ나의 고희를 축하한다는 시를 받고서 _ 105
ㆍ국화 _ 106
ㆍ초의 선사에게 _ 107
ㆍ나이가 몇인가 묻지를 마오 _ 109
ㆍ어찌 우리더러 팔순 늙은이라고 말하나 _ 110
ㆍ큰아들 명준의 죽음을 슬퍼하며 _ 112
ㆍ난초 그림을 보면서 _ 113
ㆍ장마가 그쳐 _ 114

[우리나라 시인들의 시를 논하다]
1. 고운 최치원ㆍ소화 박인량 _ 117
2. 익재 이제현 _ 118
3. 목은 이색ㆍ정지상 _ 119
5. 척약재 김구용 _ 120
9. 퇴계 이황 _ 121
16. 용재 이행ㆍ읍취헌 박은 _ 122
17. 삼당파와 김정 _ 123
18. 호음 정사룡 _ 124
21. 석주 권필 _ 125
22. 백운 이규보ㆍ매호 진화 _ 126
24. 오산 차천로 _ 127
28. 오봉 이호민 _ 128
30. 난설헌 허초희 _ 129
31. 의고(擬古)의 학풍 _ 130
33. 괴애 김수온ㆍ백곡 김득신 _ 131
34. 택당 이식 _ 132
35. 청음 김상헌 _ 133
[부록]
ㆍ신위의 시와 인생에 대하여 _ 137
ㆍ연보 _ 142
ㆍ原詩題目 찾아보기 _ 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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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하 신위 시선 이용현황 표 - 등록번호, 청구기호, 권별정보, 자료실, 이용여부로 구성 되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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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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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위는 영조 45년(1769) 8월 11일, 서울 장흥방에서 신대승의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자는 한수(漢叟), 호는 홍전(葒田)이라고 하였다가, 뒤에 자하(紫霞)로 바꾸었다. 그가 어렸을 대에 경기도 시흥의 자하산 별장에서 글공부를 하였기 때문이다.
정조 23년(1799)에 실시된 알성시의 문과 을과에 합격하여, 그 이듬해 4월에 의정부 초계문신(抄啟文臣)으로 발탁되었다. 등과하기 이전에 정조가 신위의 재주를 듣고 편전에 불러 그 재주와 학문을 시험해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10년 동안 한직에 머물다가 순조 11년에야 비로소 내직으로 옮겨 정3품에 올랐다. 이어 청나라로 가는 주청사의 서장관이 되어 북경에 따라갔는데, 이 연행(燕行)이 신위가 ‘유소입두(由蘇入杜)’의 기치를 내세운 동기가 되었다. 신위는 북경에서 당대의 석학인 담계(覃谿) 옹방강(翁方綱, 1733~1818)과 사귀게 되어, 청나라의 시학(詩學)에 대하여 물었다. 이 만남에서 감동을 받고는 돌아와서 그때까지의 글들을 모두 불태워 버렸다. 그는 곡산부사를 거쳐서 나이 쉰에 춘천부사로 부임하였는데, 이 동안에 가장 많은 책을 읽었고, 가장 많은 시를 지었다.
- <신위의 시와 인생에 대하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