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국회도서관 홈으로 정보검색 소장정보 검색

목차보기


(1) 서부 태평양 전쟁의 배경
(2) 모로타이 작전
(3) 서부 태평양 최후의 격전지, 팔라우 제도
(4) 일본군 필리핀 점령
(5) 필리핀 탈환 작전 개시
(6) 레이테 해전 배경
(7) 사상최대의 레이테 해전
(8) 가미가제 특공대
(9) 구조작전과 종결
(10) 레이테 지상전
(11) 부록 (전투관련 통계자료)

이용현황보기

펠렐리우 비행장 = Pelelieu field : 서부 태평양 전쟁 이용현황 표 - 등록번호, 청구기호, 권별정보, 자료실, 이용여부로 구성 되어있습니다.
등록번호 청구기호 권별정보 자료실 이용여부
0002873996 940.5425 -22-1 서울관 서고(열람신청 후 1층 대출대) 이용가능
B000084741 940.5425 -22-1 부산관 서고(열람신청 후 2층 주제자료실) 이용가능

출판사 책소개

알라딘제공
<펠렐리우 비행장(서부 태평양 전쟁)>은 2000년에 첫 비행장 시리즈인 <헨더슨 비행장(태평양 전쟁의 갈림길)>을 출판한 저자가 <베시오 비행장(중부 태평양 전쟁)>, <나잡 비행장(남태평양, 뉴기니 전투)>에 이어서 비행장 시리즈로서는 4번째로 저술한 책이다.

이 책은 미군이 필리핀 탈환을 앞두고 1944년 9월에 실시한 모로타이(오늘날 인도네시아의 최북단 섬 가운데 하나) 상륙작전과 오늘날 독립국 팔라우의 펠렐리우(Pelelieu) 비행장을 점령하기 위해 격렬하게 벌어진 펠렐리우섬 상륙작전, 그리고 1944년 10월에 한반도의 1.5배 크기 해역에서 전대미문의 사상최대 규모로 벌어진 레이테 해전과 조그만 레이테섬에서 25만명의 미군과 일본군이 치열하게 싸운 레이테 지상 전투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다.

레이테 해전 이전에는 제1차 세계대전중 영국과 독일 함대가 유틀란트 반도 앞바다에서 싸운 유틀란트 해전이 가장 큰 규모였으나 레이테 해전 때문에 유틀란트 해전은 사상최대 해전의 명예(?)를 내주게 되었다.

레이테 해전에서 일본 해군은 항공모함 4척, 전함 3척, 순양함 6척, 구축함 12척이 침몰하고 항공기 수백대를 잃었고 1만명이 전사하였다. 여기에 비해 미국 해군은 항공모함 3척, 구축함 3척이 격침되었고 항공기 2백여대를 잃고 3천명이 전사하였다. 양측의 피해만 보아도 이 해전이 얼마나 큰 규모의 해전이었는가를 상상할 수 있다. 미 해군의 작전 실수로 일본 해군에게도 승리의 기회가 주어졌으나 구리다 다케오(栗田健男) 제독이 아둔한 결정을 함으로써 일본군은 패배를 하게 된다.

이 해전에서 일본 해군은 허리뼈가 꺾어져 그 이후 태평양 전쟁이 끝날 때까지 미국 해군과 단 한 차례 의 해전도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이와 관련된 당시의 상황을 저자가 미·일 양측의 입장을 냉정하게 평가한 것은 인상 깊다.

저자는 미·일 양국의 전쟁사 문헌을 상세하게 조사한 것은 물론이고 전쟁터 곳곳을 찾아다니고 미·일 양측의 참전용사들을 만나 인터뷰 취재한 것을 바탕으로 레이테 해전을 포함한 서부 태평양 전투를 종합적으로 완벽에 가깝게 복원하였다. 40년이 넘는 세월에 걸쳐서 넓디넓은 태평양의 크고 작은 전쟁터를 빠짐없이 현장 방문 조사를 하여 책을 쓴 사례는 전쟁 당사국인 미국과 일본에도 없다. 이런 면에서 저자는 태평양 전쟁사에 관해 독보적인 저술가로 명성을 얻고 있으며 유튜브 <권박사 지구촌 TV>를 통해 컬러 사진과 영상으로도 많은 자료를 공유하고 있다.

책 제목인 <펠렐리우 비행장>은 조선인 노무자들이 만든 비포장 비행장으로서 아직도 비포장 상태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이 사실은 태평양 전쟁이 미국과 일본만의 전쟁이 아니라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증언해 주고 있다. 652 페이지로서 두꺼운 책이나 일단 책을 열면 흥미진진한 책 내용에 빠져서 단숨에 독파할 것이다. 태평양 전쟁에 관심이 있는 분, 부사관 이상 군대의 간부, 기업의 임직원, 그리고 학생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참고로 저자는 향후 2026년까지 <문다 비행장(서부 솔로몬 전투)>, <클라크 비행장(필리핀 탈환전투)> 그리고 <노스 비행장(미·일 최후의 격전)>을 추가로 저술하여 ‘태평양 전쟁 비행장 시리즈(7권)’를 완결할 계획이다.

책속에서

알라딘제공
서부 태평양 전쟁의 배경
-전반적인 정세
1944년 6월, 중부 태평양의 마리아나 제도 서쪽 해상에서 벌어진 ‘필리핀해 해전(Battle of Philippine Sea)’에서 패배한 일본 해군은 8월초에는 마리아나 제도의 요충지인 괌, 사이판, 티니안 등 주요 섬을 미군에게 완전히 빼앗겨 일본은 전쟁을 계속 수행하는 데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일본은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기 이전에 항공모함 보유수에 있어 미국을 능가하였으나 미드웨이 해전을 비롯한 해전을 통해 여러 척의 항공모함이 침몰하거나 파손되어 항공모함 기동부대를 재건하려고 하였으나 역부족이었다. 그러므로 함대 결전으로써 미국 함대를 격멸하려던 전쟁초기의 계획은 점차 현실에서 멀어져갔다. 그리고 절대 국방선이라고 설정하였던 마리아나 제도를 미군에 빼앗기자 오가사하라(小笠原) 제도, 오키나와, 타이완, 필리핀이 제1선으로 되었다. 일본 대본영은 만약 오가사하라를 미군에게 빼앗기게 되면 미군이 직접 오가사하라에서 일본 본토에 상륙할 가능성이 현실화 될 것을 우려하였다. 그리고 개전 초기에 점령한 남방(오늘날의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베트남 등지)에서 일본으로 수송되는 자원(석유, 고무 등)의 통로로서 대동맥 역할을 하는 필리핀과 타이완을 잃게 되면 일본으로서는 전쟁을 수행할 수단이 없어지게 된다는 우려에서 대본영(大本營)은 타이완, 필리핀 방어를 포함한 넓은 지역에서의 작전을 구상하게 된다.

1944년 6월 16일, 중국 쓰촨성(四川省)의 쳉두(成都) 비행장에서 발진한 미 육군 항공대 소속의 B29 중폭격기들이 공업지대가 있는 북(北)규슈를 처음으로 폭격하였고, 미군이 점령한 마리아나 제도의 사이판, 괌, 티니안 등 섬의 비행장에서는 B29 폭격기들이 일본본토 첫 폭격을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같은 해 5월 27일, 미군은 뉴기니섬의 서북쪽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일본군의 요새지 비악(Biak)섬에도 미군이 상륙하였다. 버마(미얀마) 전선에서는 인도를 점령하려고 1944년 3월에 개시된 인팔(인도의 동북부 도시) 작전이 좌절되어 7월초에 작전이 중지되고 영국군이 주축이 된 영국군에 밀려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태평양 방면에서 정세가 일본에 전면적으로 악화되고 있는 동안 유럽전선에서는 일본, 독일과 함께 추축국이던 이탈리아가 이미 1943년 9월에 연합국에 항복하였다. 이어서 미군은 1944년 1월 22일에 로마의 외항인 안지오(Anzio)에 상륙함으로써 미국, 영국 등 연합군은 1944년 6월 4일에 로마에 입성하였다. 그리고 이틀 뒤인 6월 6일에는 사상최대의 상륙작전인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성공하여 연합군은 독일을 향하여 전진하기 시작하였고 같은 시점에 유럽 동부전선의 소련군은 폴란드 바르사바 동쪽 300 km 까지 도달하여 독일군을 압박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독일은 동,서,남쪽 3방향에서 포위된 상태로 사실상 시간문제이지 패전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것이 제2차 세계대전을 위에서 내려다 볼 때 1944년 하반기의 국제 정세였다. 일본은 마리아나 제도의 육상전과 해전에서 패전의 책임을 지고 7월 18일에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내각이 총사직하고 20일에 고이소 구니아키(小磯國昭)를 수상으로 한 새로운 내각이 들어섰다. 암울한 전세에 수상이 된 고이소는 악화되고 있는 전세(戰勢)를 타개하기 위한 방위대책을 수립하게 된다.

-첩호작전 계획
앞서 설명한대로 일본 대본영은 1944년 6월 이후의 전황이 극히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었으므로 미군이 7월 24일 티니안에 상륙하던날, 중부태평양 방면 상황이 점차 절망적으로 변해가는 것을 파악하고 새로운 방어작전을 구상하였다. 대본영은 최후의 결전을 준비하는 결의를 하고, 고이소 내각이 들어선 다음날인 7월 21일에 ‘승리 작전’이라는 뜻의 이름을 붙인 ‘첩호(捷號)작전’의 방침을 만들었다. 그것은 북쪽 지시마(千島)열도에서 시작하여 일본본토, 서남제도, 타이완, 필리핀을 연결하는 선으로서 내습해오는 적을 이 선에서 육해군의 협동작전으로 격파하는 총합작전계획이었다. 해군은 기지항공부대의 강화를 중심으로, 잠수함부대를 재건하고 수상부대의 정비를 급속하게 진행하며, 육군은 소련에 대한 전쟁준비를 희생하여서라도 태평양 방면 작전에 전력을 기울인다는 방침을 세웠다.

이미 미군 상륙에 의해 중부 태평양에 설정한 일본군의 절대방위권 일부가 붕괴되자 대본영은 새로운 정세에 대처하기 위해 미군의 차기 진공작전이 다음표의 4개 지역에서 벌어질 것으로 예측하고 결전준비의 일환으로 이 방어 작전을 만든 것이다. 대본영은 4개 지역 가운데 미군이 우선 필리핀과 타이완을 공격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여 필리핀 방어 작전을 첩1호 작전, 그리고 타이완 지역 방어 작전을 첩2호 작전이라고 불렀으며 구체적인 방어지역은 다음표와 같다. 참고로 일본은 1940년대 초까지 타이완 전역에 군사시설을 하였고 군수공장들을 가동하고 있었으므로 일본으로서는 지리적으로 그리고 전략적으로 타이완 방어를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다.

-------------------------------------------------------------------
첩 작전번호 방어 지역
------------------------------------------------------------------- 1호 필리핀
2호 타이완, 오키나와, 규슈(九州)
3호 혼슈(本州), 시코쿠(四國)
4호 홋가이도(北海道), 지시마(千島), 가라후도(樺太: 사할린)
------------------------------------------------------------------------

대본영이 첩호 작전에서 특히 가장 중점을 둔 것은 육해군 항공부대의 통일 운용이었다. 대본영에서는 첩호 작전은 육해군의 전력을 집중하는 것이므로 공격의 방향을 적의 기동부대에 둘 것인가 아니면 상륙 선단에 둘 것인가를 논의하였다. 그 결과 해군은 적의 기동부대를, 육군은 적 상륙선단을 공격하는 것으로 임무를 나누었다. 이외 압도적인 적 규모를 대항하기 위해 자살 공격대용으로 준비중인 특공 무기의 사용도 검토하였다. 대본영은 연합함대에 첩호작전 명령과 구체적인 작전 요령, 방침, 부대 구성 등을 8월 1일에 지시하였다.

한편, 미군은 9월 15일에 오늘날 인도네시아 최북단에 있는 모로타이(Morotai)섬과 필리핀 제도의 동남부에 있는 팔라우(Palau) 제도의 펠렐리우(Peleliu)섬에 동시에 상륙작전을 벌였다. 같은 날 두 섬에 미군이 상륙하였지만, 본서에서는 미군이 뉴기니에서 일본 본토를 향해 북상하는 코스에 있는 모로타이섬 전투를 먼저 다루고 이어서 서부 태평양 최후의 격전지인 펠렐리우섬 전투를 다두고 있다. 모로타이섬에는 미국 육군이 방해를 받지 않고 상륙하였으나 펠렐리우섬에서는 미국 해병대가 상륙해안에서 피해를 입었고 상륙후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펠렐리우섬의 격전은 그 격렬함에 있어 모로타이 전투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치열하였다.

2. 모로타이 작전

-모로타이섬
오늘날 인도네시아의 가장 동북쪽에 있는 섬 가운데 하나인 모로타이섬은 말루쿠(Maluku) 제도에 속한 섬이다. 말루쿠 제도는 과거에는 몰루카스(Moluccas)제도라고 불렀다. 모로타이섬은 필리핀과 가까우며 섬 면적은 약 2,500㎢ 로서 우리나라 제주도의 약 1.4배 크기이다. 섬에는 16세기말에 향료를 찾아서 포르투칼인들이 들어온 뒤에 그 뒤를 이어 네덜란드인들이 들어와 섬을 네덜란드 영토로 만들었다. 네덜란드인들이 들어 올 때에 섬의 인구는 9천명이었으나 그들은 모두 바닷가 해안근처에 마을을 이루고 주거하였고 (오늘날도 주민들은 수백 년 전과 다름없이 바닷가에 마을을 이루어 살고 있다),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이 섬에 백인이라고는 네덜란드 선교사와 그 가족밖에 없었다. 1942년 초 일본군은 이 섬을 점령한 뒤 유격전 훈련을 받은 육군 4개 중대(450명)과 해군 초소요원을 포함하여 500여명의 병력을 배치하였다. 이 병력은 미군 상륙시에 가와시마 다케노부(川島威伸) 소좌(소령에 해당) 지휘아래 섬을 방어하고 있었다.

타원형 모양의 모로타이섬은 길이 70km, 폭 40km로서 섬 주위는 산호초로 둘러싸여 있다. 섬의 중부와 북부는 높이 1천m가 넘는 산이 있으며 지형은 험하고 울창한 열대우림으로 덮여있으나 서남부 지역은 길이 15km, 폭 7km 정도 크기의 다루바(Daruba)평야가 있다. 섬의 서남부에는 모로타이 해협을 향해 뻗쳐 있는, 돼지 꼬리처럼 생긴 길이 9km, 가장 큰 폭이 2km인 길라(Gila)반도가 있다. 반도의 동쪽은 바다가 깊고 날씨가 나빠 상륙작전에 방해가 되나 반도 서쪽은 비록 산호초가 있지만 상륙하기에는 동쪽보다 유리한 조건이다. 미군이 상륙할 당시, 일본군은 이 반도의 북쪽 평야의 피토이(Pitoi) 지역에 비행장을 만들다가 배수 문제에 부딪혀 비행장 건설을 중지한 상태였다.

- 작전 목적
맥아더(Douglas MacArthur) 장군 휘하의 미군은 1944년 8월까지 뉴기니섬 서북부의 보겔콥(Vogelkop) 반도를 점령하여 뉴기니 작전을 종료하였다. 그러나 필리핀 탈환을 목표로 하는 맥아더 앞에 보겔콥 반도의 북쪽 끝에서 필리핀 남부의 민다나오섬까지는 아직도 1,100km나 남아 있었다. 이 거리의 중간에는 말루쿠 제도의 할마헤라(Halmahera)섬과 모로타이섬, 그리고 탈라우드(Talaud)제도 등이 놓여있다. 말루쿠 제도는 16세기, 유럽인들에게 ‘향료제도(Spice Islands)’로 알려진 유명한 곳이다. 그러므로 필리핀 탈환을 계획하던 맥아더는 미군이 민다나오섬에 이르기 전에 이들 섬에 상륙하는 계획을 세우고 상륙예정일을 9월 15일로 잡았다. 한편, 맥아더 휘하의 미군이 보겔콥 반도의 서부 해안에서 일본군과 교전하고 있을 때, 중부 태평양에서는 미국 해군, 니미츠 제독 휘하의 부대가 사이판, 괌 등 마리아나 제도에서 작전을 종료하고 서부 태평양의 팔라우 제도 점령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이들의 팔라우 제도에 대한 상륙예정일도 9월 15일로 예정되었다.

모로타이섬에서 남쪽으로 40km에 있는 할마헤라섬에는 일본군 제32사단과 지원 병력 모두 3만 7천명이 배치되어 섬의 북부지역에만 일본군은 9개의 비행장을 만들어 놓았다. 일본군은 제주도 약 10배 크기의 할마헤라에 큰 관심을 갖지 않고 있었으나 미군이 뉴기니 동부에서 서부로 전진해오자 1944년 초부터 섬에 견고한 방위시설을 만든 것이다. 미군의 원래 계획은 할마헤라섬을 점령하는 것이었지만 대규모의 일본군이 할마헤라를 방어할 것이라는 정보를 얻었는바, 만약 미군이 이 섬에 상륙하여 잘 훈련된 대부대의 일본군을 제압하려면 10월 25일로 예정된 민다나오 상륙작전에 차질이 있을 것이므로 맥아더는 할마헤라를 건너뛰어 일본군 배치가 미약한 모로타이 섬에 9월 15일을 기해 상륙하기로 7월 중순에 최종결정을 하였다. 미군이 할마헤라 상륙을 포기한 데에는 3만명 이상의 대규모 일본군 병력을 제압하기 위해 미군은 몇 배나 많은 부대를 섬에 상륙시켜야 하는데 석달 전에 벌어진 사상최대의 상륙작전인 노르만디 작전을 위해 상륙용 주정과 함정들이 유럽전선으로 보내졌으므로 막상 할마헤라 작전에 필요한 장비가 턱없이 부족하였던 이유도 있다. 한편 마리아나 제도에서 팔라우 제도를 향하는 니미츠 제독 역시 팔라우 동북쪽 550 km에 위치하고 있는 얍(Yap)섬을 점령하려던 원래의 계획을 변경하여 팔라우 동북쪽 740 km 에 있는 울리티(Uliti) 환초만을 점령한 뒤 얍섬을 뛰어넘어 막 바로 팔라우로 향하기로 작전계획을 확정하였다. 얍섬에는 일본군 비행장과 잠수함 기지가 있었으나 니미츠는 이곳에 상륙하지 않고 항공기로 이 섬을 초토화시키는 것으로 단락을 짓고 빈약한 일본군 수비대가 지키고 있는 울리티 환초를 점령하여 이곳을 팔라우 및 필리핀 작전에 필요한 미 해군 함대의 정박지로 사용하려고 한 것이다. 이렇게 7월말까지 육군의 맥아더 대장과 해군의 니미츠 대장이 합의한 미군의 서부 태평양 공략 작전계획 일정은 다음과 같다.

모로타이, 팔라우 제도 1944년 9월 15일
얍, 울리티 10월 5일
탈라우드 제도 10월 15일
민다나오 11월 15일

한편, 남태평양에서 가장 큰 뉴기니섬을 잃은 일본군은 뉴기니 서쪽에 있는 셀레베스섬과 인근 섬들에 항공기지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으므로 만약 미군의 상륙선단이 모로타이를 향해 가게 되면 이 일본군 항공기지로부터 도중에 공격을 받을 수 있는 위험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