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1479~1504)은 조선 연산조의 대표적인 시인이요, 갑자사화에 희생된 지사이다. 연산군의 폐정으로 자신의 큰 뜻을 펴지 못한 채 26세에 요절한 그는 시와 술로 일상의 낙을 삼았다. 짧은 생애 속에서도 적지 않은 작품을 남겼던 것은 그 때문이다. 읍취헌유고(挹翠軒遺稿)에 전하는 그의 시는 여러 대가들로부터 높이 평가되었다. 특히 김만중 같은 이는 “읍취헌의 시 솜씨는 삼백 년 만에 한 사람 날 정도다”라고 격찬하였다. 박은은 비교적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 성장하였다. 부친은 한성부 판관 담손(耼孫)이며, 모친은 경주 이씨(慶州李氏)로 제용감(濟用監) 직장(直長) 이이(李苡)의 딸이다. 아내 고령 신씨(高靈申氏)는 대제학 신용개(申用漑)의 딸이다. 신숙주(申叔舟)의 증손녀가 된다. 박은은 어려서부터 조모 청주 한씨(淸州韓氏)의 사랑과 지엄한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김종직의 문인인 최부(崔傅) 밑에서 수학하여 17세에 급제하였다. 장인 신용개의 비호와 함께 순탄한 벼슬길을 시작하였다. 따라서 나름대로의 포부 역시 지대하였다. 그러나 그가 직면한 현실은 그의 이념과는 상치될 뿐이었다. 그의 정신적 방황이 여기서 시작된다. 끝내 정치적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그는 갑자사화에 희생당할 때까지 교우와 함께 시와 술로써 일상의 낙을 삼았다. -<박은의 시와 삶> 중에서
이행(1478~1534)은 우리 한시 문단에서 박은과 함께 연산, 중종조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허균은 이행의 시를 가장 아낀다면, 우리나라 제일의 시인으로 손꼽힐 만하다고 하였다. 60편이 넘는 부(賦)를 남긴 이행은 부가(賦家)로서도 명성이 있다. 또한 그림에도 남다른 재주가 있어 많은 제화시를 남겼다. 이행은 다방면에 재능을 보인 것처럼 남다른 인생 체험을 하였다. 연산, 중종조의 무오, 갑자, 기묘사화를 직접 겪었다. 그리고 신분상으로도 유배지에서의 노비로부터 좌의정까지 두루 지냈다. 관각을 대표하는 대제학의 자리에도 있었다. 일생 동안 네 차례나 유배되었고, 결국은 57세의 나이로 유배지에서 일생을 마쳤다. 실로 그의 인생 자체가 시였음을 감지할 수 있다. - <이행의 시와 삶>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