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며, 불교학자인 김은령의 불교소설 『일연, 달빛으로 머물다』가 ‘詩와에세이’에서 출간되었다. 『일연, 달빛으로 머물다』는 『삼국유사』를 찬술한 보각국사 일연에 대한 이야기다. 일연은 아홉 살 어린 나이에 어머니 손에 이끌려 해양(지금의 광주) 무량사 산문에 들며 생애 75년을 승려의 삶을 살았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원나라의 간섭기라 말하지만 사실 원에 의한 폭압의 시대였다. 그런 시대에 나라의 자주권과 백성의 평안을 염원하던 일연의 발자취가 역사적 사실과 작가의 상상력이 교차 되며 현실처럼 펼쳐지고 있다. 작가는 우리 민족의 보고(寶庫)인 『삼국유사』가 어떻게 찬술되었으며, 일연은 왜 이것을 남겼는가에 대한 답을 찾아 나선다. 일연이라는 인물에 대한 생애, 시간, 장소 등 역사적 사실을 기저에 두고 일연의 행적을 따라가며 『삼국유사』가 일연의 철저한 계획에 의한 지난한 노력의 결과물이며, ‘불법전서(佛法傳書)’로서의 상징물임을 밝혀준다.
불국토! 일연은 비로소 자신의 염원이 어디에 닿아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이 땅에 불법을 들여온 선지자들이 그리웠다. 일천 년이 가까운 세월 저쪽에서부터 이 땅에 현현히 나투셨던 수많은 화신불(化身佛)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언젠가는 그들의 흔적을 찾아내어 지금 고통받는 저 중생들을 위무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앞서간 이들의 융성하고 아름다웠던 유사(遺事)에서 부처의 흔적을 증빙하고 싶었다.(p.93)
부처님, 당신께선 신라인들로 하여금 불국토를 재현하셨다가 지금은 어찌 거두어 가셨습니까? 땅도 사람도 그 자리이며 단지 그 이름이 신라요 고려일진대 그때의 그들은 어디에 가고 지금 이 나라의 백성들은 왜 당신을 떠나고 있습니까? 제가 지금 부처님 전에 말씀 올립니다. 당신의 뜻을, 지혜를, 말씀을 전함에 있어 법을 강설하기보다 사람이야기를 해야겠습니다. 이 웅장하고 아름다운 불국사의 창건 이야기를 전생의 인연 가피로 만들어야겠습니다.(p.138)
지금도 불국사는 한국 불교의 상징적인 사찰이다. 작가는 고려 시대 인물인 일연을 이런 불국사로 데리고 와 불제자로서 민족의 자주권과 중생구제를 어떻게 발원하고 있는지 그의 입을 빌려 세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일연에 대한 상징에는 두 개의 얼개가 있다. 민족의 주권을 위해 우리 민족의 시원을 밝히며 역대 이 땅을 지배하였던 왕조의 역사와 그 역사는 부처님의 가호 아래 융성하였다는 사실을 기록한 ‘『삼국유사』의 찬자’라는 것과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국존의 자리까지 버린 ‘효심’이 그것이다. 작가는 ‘일연은 아홉 살에 어머니 손에 이끌려 해양 무량사에 들어갔다.’라고 하는 단 한 구절에 애틋하고, 가여운 상상력을 입힌다.
처음 무량사에 어린 자식을 떼어 놓고는 도저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장산으로 돌아가자마자 짐을 꾸려 무량사 아래 해미마을로 쫓아갔었다. 새벽이면 엄동도 상관않고 찬물에 목욕재계하고, 무량사로 향했다. 무정 스님의 불호령이 무서워 절 안으로는 들어가지 못하고, 절 뒤 대숲에 숨어들었다. 해가 뜨고 아들이 방을 나와 법당으로 공양간으로 무정 스님의 처소로 들어가고 나오는 활달한 모습을 보고서야 마을로 돌아왔다. 하루 또 하루 기도하는 마음으로 아들을 지켜보면서 생활했다. 다시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린 세월, 돌이켜 생각해도 눈물난다. 넉넉잡아 석삼년만 지나면 되리라. 생면부지 낯선 마을에 거처를 잡아 길쌈으로, 잔칫집 상갓집 가리지 않고 허드렛일로 끼니를 해결하면서 세월이 가기만을 학수고대하였다.(p.83~84)
자식의 명줄을 잇기 위해 절집에 어린 아들을 두고 떠나야 했던 한 여인의 비원을 처절하고 숭고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그 비원을 병색 짙은 아들을 국존의 자리에까지 올리는 관세음보살의 원력으로 귀결시키고 있다. 작가는 이러한 모정에 대한 일연의 화답을 작가의 상상력으로 펼쳐내고 있다.
어머니는 지금 소멸해 가는 중이었다. 그러니 그 시간을 한순간도 허투루 두지 않고 자신이 챙기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와 함께 있는 하루하루가 달고 단 시간이었다. 걸음이 어려운 어머니 손을 잡고 경내를 거니는 시간은 억겁이 녹는 시간이었고, 무설당 마루에 앉아 바라보는 달은 천 년을 깁는 시간이었다. (p.187)
고려의 승려 일연이 가진 또 하나의 상징인 ‘효심’에 대해 작가는 “일연은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국존의 자리에서 내려와 인각사에 주석했다.”라는 역사적 사실로 생생하게 형상화하고 있다. 이 책에는 광주 무량사에서 강원도 진전사, 포산 대견사를 거쳐 무주암, 남해 정림사, 강화도 선월사, 포항 오어사, 청도 운문사를 거쳐 군위 인각사까지 일연의 75년간의 행로가 낱낱이 적혀 있다. 그리고 국존에까지 오른 스님으로서의 소명과 한 여인의 아들로서의 고뇌가 교차하며 당대 현실을 환하게 밝히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의 자주권에 대한 간절한 발원을 담고 있다. 따라서 이 소설은 그 시대 중생의 삶을 ‘기승전 부처’로 귀결시켜 불국토를 이루고자 하는 일연의 결연한 의지를 보여준다. 그 속에는 애달픈 모정과 지극한 효심이 교교히 빛나며 달빛처럼 만상을 여여하게 비춘다. 소설 『일연, 달빛으로 머물다』는 승려로서 한 시대의 스승이며, 한 여인의 아들이었던 일연의 흔적이다. 그리고 그 흔적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 민족의 시원과 우리 민족의 ‘유사(遺事)’가 어떻게 지금 우리 곁에 달빛처럼 머무는지 발견하게 될 것이다.
책속에서
지난 시대 이 땅에 살다 간 군왕의 역사와 부처님 도량과 그 도량을 일으켰던 조사들의 발자취와 민초들의 신심이 가득한 역사를 하마터면 잃어버릴 뻔하였다. 그 발자취를 스승인 일연 스님이 『삼국유사(三國遺事)』라는 이름으로 묶어서 자신에게 툭 던져주고 가셨다. “부처님의 법은 이렇게 흔적을 두어 진실임을 알게 하고 중생을 구제하는 것 아니겠느냐. 그러니 앞서 중생 구제를 실천하신 발자취를 남긴 분들의 행적이나 옛 시대에 있었던 주목할 만한 것들은 다 기록하여 구수한 옛이야기처럼 전승하여야 할 것이야.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도록 이야기를 만들어 전승해야 할 것이야. 그것이 나와 너의 소임이니라.” 오랑캐의 폭압 아래 민족의 주권과 백성의 평안을 기원하며, 부처님의 이야기를 만백성에게 전하고자 일생을 바쳤던 가지산문의 불제자 목암 일연(睦庵 一然)의 목소리가 꿇어앉은 무극의 어깨 위로 무겁게 내려앉았다. 무극은 일어나 밖을 보았다. 어젯밤 스승과 함께 바라보았던 밝은 달은 장지문을 밝히는 여명을 위해 자리를 비켜주고 있었으나 그 본래는 원래가 하나였으니, 원경충조! 만법을 원만하게 그리고 충만토록 비추고 있어 주위는 환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_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