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고 읽을 수 있는 SF 소설을 쓰는 젊은 작가 설재인의 장편 소설 《캠프파이어》는 그의 이전 작품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거대한 스케일로 독자들을 찾아간다.
화자인 ‘나’는 소설가이지만, 한때 고등학교 교사로 일했다. ‘나’는 옛 제자인 호은과 맥주를 마시던 중 아무런 전조 없이 인류가 납작한 종이 인형이 되어버린 세계의 멸망을 목격하고, 호은과 함께 단둘뿐이 생존자가 된다. 멸망과 함께 나타난 이족보행을 하는 사슴들이 두 사람을 자신들의 행성으로 데려가면서 이야기는 본격적인 궤도에 오른다.
《캠프파이어》는 지금껏 세계 멸망 이후 이야기를 그린 ‘포스트아포칼립스’ 장르나 멸망해버린 세계에서 생존을 위해 발버둥치는 ‘서바이벌물’과는 전혀 다른 층위에서 멸망 이후의 인류를 그려낸다. 그저 ‘종이 인형’이 되어 버린 인류의 멸망은 마치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사찰의 풍경처럼 조용하고, 단둘뿐인 인류의 생존자들인 자신의 생존을 사후 세계의 연옥에 와 있는 것처럼 받아들인다.
‘나’의 제자인 호은은 멸망 전의 지구에서 이야기를 쓰는 데 남다른 재능이 있었지만, 대학 진학, 생계 등의 현실에 부딪히며 예술가의 길을 포기하고 취업을 준비하던 중이었다. 그러나 막상 부양해야 할 가족, 취업, 걱정해야 할 미래 따위가 사라지자 그는 그 어느 때보다 필사적으로 아무도 읽어줄 사람이 없는 이야기를 쓰기 시작한다.
호은이 쓰는 이야기의 주인공은 한때 화자인 ‘나’의 동료이기도 했던 기간제 교사 송민정이다. 호은은 종이 인형이 되어 버린 수십 억의 사람들 중 왜 하필 그녀의 이야기를 쓰기로 마음먹은 것일까?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나’는 알지 못했던 비밀들이 하나씩 밝혀지면서, 서로를 이해하는 이해자로서 특별했던 스승과 제자 사이에는 새로운 갈등이 싹튼다.
이야기를 통해 쓰이는 멸망 이후의 새로운 세계 오직 문학을 통해서만 상상할 수 있는 그 아름다움에 대하여
《캠프파이어》의 특별함은 멸망한 인류의 재창조를 이야기를 통해 실현해 낸다는 것이다. 마치 ‘빛이 있으라’라는 말과 함께 세계가 창조되는 것처럼, ‘나’와 호은은 이야기가 전개됨에 따라 새로운 인류의 시작을 그린다. 작가 설재인의 역량을 엿볼 수 있는 그 온화하면서도 아름다운 세계는 오직 《캠프파이어》를 따라 읽어온 독자들만이 느낄 수 있는 새로운 영역이다.
인류가 멸망한 뒤 낯선 외계 행성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캠프파이어》는 이야기 속의 이야기라는 액자식 구성, 창조자와 창조된 자의 관계, 이야기를 쓰는 창작자의 윤리성과 로맨스까지 다양한 주제를 넘나들며 이야기를 전개시킨다. 다양한 빛깔의 이야기가 겹겹이 쌓인 《캠프파이어》는 자세히 들여다보면 붉은색 한 가지만이 아닌 여러 색으로 불타오르는 불꽃처럼 빛을 발한다.
책속에서
[P.7] 세상이 끝장났을 때 우리는 식어 빠진 감자튀김을 사이에 두고 앉아 있었다.
[P. 18~19] 사람들은 모두 종이 인형처럼 납작해졌다. 그 상태로 비닐봉지처럼 길거리에 아무렇게나 뒹굴었다. 바람이 불어오자 날거나 퍼덕거렸다. 누군가 아무렇게나 그려 오려낸 그림이 되었다. 움직이지도 말하지도 생각하지도 못하는 그림. 우리 둘만 삼차원으로 남았다
[P. 86] 대본에도 없던 엑스트라가 주인공의 행동에 유의미한 영향을 주는 존재가 되어선 안 되니까 저토록 많은 스태프들이 대응을 위해 모여든 것이겠지. 나는 내 소설 속의 인물들을 생각했다. 플롯을 딱히 정하고 쓰지 않았으므로 가끔은 의외의 인물이 튀어나와 신나게 떠들며 돌아다닐 때가 있었다. 그러면 편집자는 나에게 말했다. 그런 인물은 도구로 사용한 다음 제거해야죠. 인물을 버릴 줄도 아셔야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