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곡 라흐마니노프를 찾아서 제1장 모스크바 음악가의 성장기 제2장 이바놉카 제3장 “나의 뮤즈는 죽지 않았다오” 제4장 러시아의 은 시대 제5장 드레스덴 제6장 옛 러시아의 황혼 제7장 “단단한 모든 것은 결국 녹아 흩어지리니” 제8장 고국을 떠난 비르투오소 제9장 빌라 세나르 제10장 미국의 망명객 후주곡 모더니스트 라흐마니노프
“라흐마니노프에 대한 새로운 비평적이고 학술적인 연구는 오래전부터 필요했다. 촘촘하게 잘 연구된 이 책은 중요한 진전이다.” _ 〈그라모폰〉
위대한 음악가 라흐마니노프의 탄생 150주년 그의 삶과 음악에 대한 생생하고 독창적인 초상화 임윤찬에서 영화 〈샤인〉, ‘올 바이 마이 셀프’(‘오빠 만세’)까지
작곡가 라흐마니노프의 이름이 낯선 사람도 그의 음악은 분명 어디에선가 들어보았을 것이다. 한번 들으면 잊을 수 없는 그 선율 덕분에 (위대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자신의 책 《사색과 기억》에서 선율이야말로 하늘의 선물이요 천재의 소산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의 작품들은 클래식 음악 가운데 유달리 대중음악과 영화에 자주 사용되어 널리 사랑받았다. 〈피아노 협주곡 2번〉의 2악장을 기반으로 삼은 에릭 카먼의 ‘올 바이 마이 셀프’(1975)는 빌보드 싱글 차트 2위에까지 올랐고 이후 셀린 디옹 등 숱한 가수들이 다시 불렀다(‘개그 콘서트’에서 개그맨 박성호가 능청스럽게 부르던 ‘오빠 만세’, 바로 그 곡이다). 영화 〈7년만의 외출〉(1955), 〈사랑의 은하수Somewhere in time〉(1980) 등 영화에서뿐만 아니라 <샤인>(1996)의 <피아노 협주곡 3번> 장면에서도 그의 음악은 대중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무엇보다 18세의 나이로 밴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우승한 임윤찬의 <피아노 협주곡 3번> 결선 연주가 떠오르게 마련이다. 유튜브에서 전설적 연주자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연주 영상의 인기를 누르고 그의 연주가 조회수 1위에 오른 것도 한동안 화젯거리였다. 《라흐마니노프》는 세르게이 바실리예비치 라흐마니노프(Sergei Vasil’evich Rachmaninoff, 1873-1943)의 삶과 음악을 다룬 평전이다. 올해 2023년은 그가 탄생한 지 150주년 되는 해이지만, 국내에서 추천할 만한 그의 평전을 찾기란 어렵다. 이 책은 음악 전문 출판사 포노가 2010년부터 꾸준히 발간해온 ‘우리가 사랑하는 음악가’ 시리즈의 17번째 권으로, 13년만에 시리즈의 판형 및 편집디자인 등을 전면 개정하여 독자 곁으로 새롭게 다가간다. 러시아의 대표 작곡가이자 지휘자, 거장 연주자인 라흐마니노프는 오늘날 ‘전 세계의 피아니스트들이 뽑은 영향력 있는 전설적 피아니스트’이며(<라임라이트Limelight>, 2011년 10월), 그의 대표작 <피아노 협주곡 2번>은 역사상 가장 인기 있는 클래식 음악 가운데 하나로 자주 선정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생전뿐 아니라 사후에도 대중적 인기와 달리 작곡가와 음악학자들에게 오랫동안 외면당하곤 했다. 비평가들은 라흐마니노프와 그 음악을 스트라빈스키와 같은 혁신적인 동시대 작곡가들의 현대적 실험과 거리가 먼 구시대적 낭만주의 전통의 일부로 인식했다. 일례로 1952년 음악평론가 레오니트 사바네예프는 라흐마니노프에 대해 “전적으로 19세기 사람이었다. 어떠한 이유로든 그는 20세기를 인지하지 못하였으며, 그의 모든 작품은 말하자면 19세기 음악의 자투리이다”라고 격하했다.
이참에 가슴에 손을 얹고 자문해봅니다. ‘과연 나는 그러한 선입견에 휘둘리지 않고 라흐마니노프를 온당히 평가하고 있었는가? 선율이 귀에 착착 감기는 음악을 쓴 작곡가들을 은근히 한 수 아래로 깔아뭉갠 적은 없었던가? 그리하여 슈베르트, 차이콥스키, 드보르자크, 푸치니, 라흐마니노프를 한 바구니에 쓸어 담은 뒤 괜히 박대하진 않았던가’ 고백하건대, ‘아니오, 나는 그러지 않았소’ 하고 당당히 항변하지 못하겠습니다. _ 옮긴이의 말, 374쪽
권위 있는 《그로브 음악 및 음악가 사전》은 1954년판에서 ‘라흐마니노프’ 항목에 고작 다섯 단락을 할애하는 데 그쳤지만, 판을 거듭하며 계속 늘어나 2001년판에서는 무려 열한 페이지에 걸쳐 사진과 함께 상세히 설명한다. 그에 대한 평가는 계속 우상향되어 온 셈이다. 저자 미첼은 이처럼 ‘우울함의 대명사’, ‘고향에 대한 향수에 젖어 있던 음악가’ 등 라흐마니노프에 대한 기존 이미지에 의문을 제기하고, 예술과 음악이 인간의 삶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에 관한 논쟁이 뜨거웠던 20세기 초 러시아의 ‘은銀 시대’라는 커다란 흐름에 투신한 그의 진면목을 발굴한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까지 너무 한쪽 측면에 기운, 어두운 우수를 품은, 그리고 과묵하고 진중한 표정의 라흐마니노프만을 알아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19세기에 갇힌 20세기 음악가’, ‘고향을 향한 그리움을 끝내 떨치지 못한 애수의 음악가’, ‘단조短調의 작곡가’ 같은 정형화된 이미지로 말입니다. 라흐마니노프의 전체 삶을 고루고루 조망한 미첼의 이번 책이 그간 다소 곡해되어온 그의 모습을 바로잡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_ 옮긴이의 말, 378쪽
모스크바 음악 성장기부터 미국에서 영면하기까지 <피아노 협주곡 1번>에서 <교향적 춤곡>이 탄생하기까지 라흐마니노프 연구에 새로운 초석을 놓는 평전
러시아와 미국 및 유럽에서 라흐마니노프와 그의 음악은 불확실한 세계와 조화를 이루는 대단히 현대적인 삶의 표현이었다. 이 새로운 평가를 위해 저자는 라흐마니노프의 삶을 그가 살았던 역동적인 당대 상황에서 재구성한다. 풍부한 연구 자료와 40점이 넘는 사진을 바탕으로 러시아의 빈한한 귀족 가문에서 보낸 어린 시절부터 칠순 생일을 며칠 앞두고 미국 베벌리힐스의 자택에서 영면하기까지, 그의 첫 작품 <피아노 협주곡 1번>부터 최후 작품인 45번 <교향적 춤곡>이 탄생하기까지 라흐마니노프의 일생을 생동감 있게 그려낸다. 또한 라흐마니노프의 재능을 처음 알아봤을 뿐 아니라 <피아노 협주곡 1번>을 헌정 받은 사촌 알렉산드르 실로티, 라흐마니노프에게 자애로운 아버지이자 엄격한 스승 역할을 맡은 니콜라이 즈베레프, 피아니스트 롤 모델인 루빈시테인과 작곡가 우상인 차이콥스키, 첫 작품 <피아노 협주곡 1번> 초연 실패 후에 겪은 우울증을 치료해준 은인 니콜라이 달 박사, 라흐마니노프의 심적 안식처가 되어준 스칼론 자매들과 사틴 남매들 등 라흐마니노프의 주변 사람들의 기록과 인터뷰 등을 통해 그의 삶을 다각적으로 접근하여 입체적으로 묘사한다. 라흐마니노프는 당대 상류층 청년들이 흔히 택하던 진로인 공무원 대신 직업 음악가의 길을 택했지만 탐보프 지역의 가족 별장 ‘이바놉카’를 유지할 만큼 러시아에서 나름의 음악적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1917년 볼셰비키혁명으로 러시아를 떠나 망명객 신분이 되어 작곡에서 연주 및 지휘로 활동 방향을 넓힌다. 가족을 부양해야 했던 것이다. 당대 최일선 녹음 기술의 혜택을 입은 선두급 콘서트 피아니스트로서 입지를 굳혔고 경제적으로 크게 성공한다. 1925년 <타임>지에 따르면 그는 베이브 루스의 두 배가 넘는 소득세를 납부했다. 그는 스위스에 새로운 거처 ‘빌라 세나르’를 건축한다. 이 집은 옛 가족 별장과 마찬가지로 그에게 작곡의 새로운 에너지를 불러일으켰다. 피아노 독주곡 <코넬리 주제에 의한 변주곡, 작품 42>를 썼고, 이후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 <교향곡 3번> 등 작품 활동을 활발히 이어간다. 그러나 유럽 대륙에 전운이 감돌면서 1939년 여름, 이곳에서도 떠나야 했다. 라흐마니노프는 은퇴 후의 생활까지 염두에 두고 1942년 미국 캘리포니아 베벌리힐스에 주택을 구입하지만, 이곳에서의 삶은 생애 마지막 몇 주뿐이었다.
1943년 1월 라흐마니노프의 몸 상태는 급격히 악화되기 시작했다. 몸 왼편에 통증이 심해졌고, 피로와 체중 감소가 이어졌다. 가시지 않는 기침은 좀 더 심각한 질환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불렀다. 소모프 부부는 2월 5일 오하이오주 콜럼버스에서 열린 라흐마니노프의 연주회를 찾았다가 친구의 “고통에 신음하는 수척한 얼굴”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2월 17일 테네시주 녹스빌 콘서트는 그의 마지막 연주회가 되었다. 이날 라흐마니노프는 바흐의 <영국 모음곡 2번 a단조>를 연주하였는데, 이 곡은 1885년 젊은 청년이 즈베레프의 집을 찾은 안톤 루빈시테인 앞에서 쳤던 작품이다. _ 322쪽
라흐마니노프는 제정 러시아 말기의 역동적으로 급변하는 지적·문화적 환경 속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한 음악가였다. 스크랴빈, 프로코피예프, 스트라빈스키로 대표되는 작곡 기법상의 혁신을 거부하긴 했지만, 그는 음악이 여전히 인간 존재에 잠재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형이상학적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현대 담론에 깊이 몰입했다. 따라서 저자는 라흐마니노프에 대한 평판 바로잡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그가 현대적 음악을 쓴 현대적 인물이었다고 주장한다. 현대성과 모더니즘을 구별하여, 라흐마니노프도 본인이 현대에 속함을 인지하고 그 속에서 자기의 창조적 자리를 찾으려 분투했다고 말한다. 이처럼 이 전기는 라흐마니노프의 삶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줄 뿐만 아니라 그의 경력에 대한 재평가와 재발견이라는 오랫동안 미뤄왔던 연구의 초석이 될 것이다.
책속에서
[P.34~35] 바실리 라흐마니노프는 경제적 관념이 형편없었고 방종한 생활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아내가 가져온 결혼 지참금도 금세 바닥이 나고 말았다. 일가는 1882년 마지막 남은 주택 ‘오네그’를 경매로 매각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사했다. 비좁은 아파트 생활의 갑갑함을 어떻게든 줄이기 위해 부부는 차남 세르게이를 당분간 이모 마리야 트루브니코바에게 맡겼다.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사한 직후 라흐마니노프에게는 여러 트라우마가 찾아온다. 누이 소피야가 디프테리아로 숨을 거두었고, 곧이어 부모가 기약 없는 별거에 들어갔다.
[P. 43~44] 즈베레프는 제자들에게 자애로운 아버지와 엄격한 스승 역할을 모두 수행했고,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으면 매를 들기도 했다. 그는 라흐마니노프와 두 동문에게 투철한 근면성을 심어주었을 뿐만 아니라(세 소년은 순번대로 번갈아가며 새벽 여섯 시에 기상해 연습하는 것이 의무였다) 클래식 음악 레퍼토리에 관한 깊은 지식을 나누어주었고, 피아노 주법상 기본 훈련 사항을 철저히 가르쳐 이들이 전문 연주자로 활동하는 과정에서 크게 도움 받도록 했다. 라흐마니노프의 전설적인 철두철미함과 꾸준한 연습 스케줄은 의심의 여지없이 즈베레프 문하에서 길러진 덕목이었다. 그가 즈베레프에게 배운 가장 중요한 사항은 연주시 손의 위치와 음악을 향한 마르지 않는 사랑이었다.
[P. 48~49] 라흐마니노프는 평생토록 루빈시테인을 예술적 성취의 상징으로 여겼다. 그에게 루빈시테인은 그저 기교가 뛰어난 비르투오소가 아니라 진정한 예술가였다. 27 배리 마틴이 지적한 것처럼 루빈시테인이 남긴 영향력의 메아리는 연주자 라흐마니노프의 후년에도 들려왔다. 라흐마니노프의 연주 레퍼토리는 루빈시테인의 그것과 놀랍도록 유사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심지어는 사람들의 설왕설래가 많았던, 쇼팽 〈피아노 소나 타 b플랫단조〉 ‘장송 행진’ 악장의 반복부를 포르티시모로 해석한 것 역시 실은 루빈시테인에게서 배운 혁신이었다.” 확실히 루빈시테인은 라흐마니노프의 뇌리 한구석을 점유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교향곡 1번〉 초연 실패 이후 우울증에 빠진 라흐마니노프가 일손을 잡지 못하고 번민하고 있을 때 꿈에 나타나 “왜 일을 하지 않나? 왜 연주를 하지 않느냐고” 하고 꾸짖은 것도 루빈시테인이었다고 하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