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개화(開花)의 거리·15 뱀꽃도 흙에서 핀다·16 몹쓸 증후군 ·18 호치키스·20 민달팽이 1·21 채널 유목민·22 늪·24 물속을 나는 새·26 가장 높은 바닥·28 나무가 전하는 바람의 말·30 소금쟁이·32 속으로 피는 노을·34 나귀는 일어서기 위해 무릎을 꿇는다·36 종이의 겹·38 야릇한 미소·40 헛도는 속도·42 두벌식 도서관·44 줄을 바꾸다·46 타원의 고리·48
2부 지인 같기도 한·53 잠자는 직업·54 집새·56 달을 부는 사람들·58 선돌의 부화·60 잔등노을·62 파이프오르간·64 식물의 뿌리·66 울음을 지우는 약손·68 바람은 새의 행로를 묻지 않는다·70 멀리뛰기·72 젖말의 폐곡선·74 이 대 팔·76 니르바나의 표정·78 심폐소생술·80
4부 민달팽이 2·117 꽃 피는 톱날·118 은빛 착지로 만든 성·120 귀촌·122 스노클링 파이프·124 하얀 등대섬·126 밥톨의 계산법·128 두 발에 날개가 돋았다·130 흙탕물이 가라앉는 시간·132 푸른 꽃·134 거푸집의 윤회·136 빛 요리사·138 하늘에 핀 붉은 해바라기·140 가을의 각도·142 배꼽시계·144 아름다운 마침표·146
발문 | 문정희(시인) 시를 쓰는 즐거움을 아는 시인·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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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책소개
체험이 육화되어 스스로 우러나 태어난 시
정연희 시인의 시집 『나무가 전하는 바람의 말』이 시인수첩 시인선 77번째로 출간되었다. 정연희 시인은 2012년 김유정 기억하기 전국 공모전에서 최우수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고, 그 후 생명 문학상 장원과 미래에셋 전국 공모전 대상, 등대 문학상, 동서 문학상 등 다수의 상을 받았다. 2017년에는 《전북일보》와 《농민신문》 시 부문에 당선되면서 신춘문예 2관왕의 영예를 안았다. 《전북일보》의 당선작 「귀촌」은 “사라져가는 우리 것의 소중함을 지켜내려는 시심, 모국어의 지킴이로서 올바른 시인의 사명에 대한 자각, 체험이 육화되어 스스로 우러나온 태어난 시를 쓰는 시인이라는 유안진 시인의 평을 받았다. 《농민신문》 당선작인 「잔등 노을」은 ”이미지가 활달하고 선명하며 대상을 그려내고자 하는 치열함이 절로 읽“히고, 그 “치열함마저 넘은 담담한 마음이 이미 싹”트고 있다고 함민복 시인은 언급하였다. 첫 시집 『나무가 전하는 바람의 말』에 대하여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는 나무와 부드럽게 또는 거세게 불어오는 온갖 종류의 바람을 견디는 여러 유형의 아픔을 가진 사람들”을 나무로 은유해내어 시를 썼다고 한다. 시인은 2023년 《시인수첩》 겨울 호에 실릴 에세이에서 이렇게 말한다. “形而上, 形而下 그 어떤 것과도 소통이 이루어지는 작품세계가 있어 행복하다. 시공간을 초월한 일상생활의 모든 희로애락에 대한 애증의 소재가 나에게는 빛을 향한 출구다. 또한 시는 나의 긴 호흡이다. 타인의 시에서 열정을 배우고 詩作을 하면서 어둠을 깨치고 푸른빛으로 솟아오르는 날개 죽지를 본다. 그 날개는 동화의 나라로 날아가는 타임머신이며 가끔 칭얼대도 좋은 즐거운 비빌 언덕이다. 여생을 시 친구와 함께하며 고운 삶으로 마무리 하고 싶다.”라고 한다. 정연희 시인은 “인간성의 상실로 길을 잃고, 안개 속에서 허우적”이는 미래의 삶에 대해 고민한 흔적들을 독자들과 나누고 싶어 한다. 그것을 시인은 시문학을 지향하는 시인의 특권이자, 행복한 순간들이라고 진술한다. 과학의 발달과 문명의 발달이 가져온, 세계의 여러 부조리함과 폭력은 인간의 삶을 피폐하게 할 뿐만 아니라, 희망을 앗아간다. 시인은 이에 순응하지 않고 나무의 중심과도 같은 시의 세계를 바라보려 애쓴다. 때로는 휘어지기도 하며 욕심을 버리고, 시와 삶을 아름답게 가꾸고자 한다. 독자들에게 이 시집은 아픔의 시간을 나눌 수 있는 연대의 마음을 선사할 것이다. 시집을 읽는 내내 ‘形而上, 形而下’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시간이 될 것이다.
● 다음은 시집에 관하여 나눈 정연희 시인과의 미니 인터뷰 내용이다.
⬕ 침묵의 대상들이 하고 있는 말에 귀 기울이고파 침묵 속에는 하고 싶은 무수한 말들이 들어있다. 모든 시편이 헛되이 쓰이지 않기를 바란다. 또한 시를 읽는 일이 부끄럽지 않은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세상에 일어나는 불합리한 일 때문에 아파하는 사람들에게, 더불어 진실과 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이 시집이 위로와 희망의 끈이 되기를 바란다.
⬕ 사유의 깊이와 미학적 감동으로 이루어진 문학적 진실 “시문학이 지닌 제일의 가치는 문학적 진실에 있다. 문학적 진실은 필연적으로 사유의 깊이와 미학적 감동으로 이루어진다.”는 전북일보 신춘문예 당선 심사평을 매우 좋아한다. 비틀고 꾸미려 애쓰지 않고 진실을 담았다. 둥근 집 하나 갖지 못한 무주택의 아픔을 그린 <민달팽이>처럼 시 전체가 은유와 중의적 표현이 많다. 실제 평상시의 사고가 세상 모든 이의 아픔에 공감하며 함께 아파하는 습관이 시로 표출된 것이다. 필자 역시 스스로 글을 쓰며 위로받고 힘을 얻는다.
⬕ 낮은 자들의 아픔에 공감하는 시를 쓰고파 주로 직접 보거나 느꼈던 사물이나 낮은 자들의 아픔이 들어 있다. 인도 여행 중에 만난 하층민인 인간 세탁기 도비왈라의 삶을 바닥을 기는 뱀의 꽃으로 비유한 <뱀꽃도 흙에서 핀다>, 무주택의 설움인 <민달팽이>, 전쟁에서 희생된 젊은이들을 바라보는 안타까움을 표현한 <하늘에 핀 붉은 해바라기> <밤새 불꽃이 내리고>처럼 세상 곳곳에 있는 약한 자의 소리다. 우루무치 박물관에 원형대로 보존된 미라를 보고 고비 사막의 애환을 그린 <잠자는 직업>은 사라져 박제로 남아 있는 사람들의 허무한 생을 그렸다.
⬕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바람은 순간 스치고 지나갈 뿐이지만 나무는 등이 휜 채 평생을 살면서 푸른 잎을 내며 사람들에게 소소한 행복감을 준다. 세상이 넓어도 작은 발 디딜 곳 없는 캄캄한 동굴 속에서 빛줄기를 향해 걷고 또 걸으며 앞으로 나아가라고 말하고 싶다. 분명히 출구가 기다리고 있고 환희의 빛을 볼 것이다. 늘푸른나무처럼 작을지라도 행복을 나눠주는 일에서 기쁨을 누리고 스스로 위로 받으며 아주 작은 꿈일지라도 두 손에 꼭 쥐고 이루어 나가기를 바란다.
― 「저자와의 인터뷰」 중에서
시를 쓰는 즐거움을 아는 시인
“소 잔등에 부르르/바람이 올라타고 있다/곱슬거리는 바람을 쫓는 꼬리는/등뼈를 타고 나간 장식/억센 풀은 뿔 이 되고/오래 되새김질한 무료는 꼬리 끝에서 춤춘다//스 프링을 닮은 잔등 속 간지러움은/온갖 풀 끝을 탐식한 벌/ 한 마리 꽃의 몸속에 피는 봄/연한 풀잎이 키운 한 마리 소는/쌓아 놓은 풀 더미 같고/잔등은 가혹한 수레의 우 두머리 같다//논두렁 길 따라 비스듬히 누운/온돌방 같은 소 한 마리/눈 안에 풀밭과/코뚜레 꿴 굴레의 말[言]을 숨 기고/쫓아도 달라붙는 등에를 외면하는/저 순응의 천성/ 가지런한 빗줄기가 껌벅 껌벅거린다//융단처럼 펼쳐놓은/ 노을빛 잔등이 봄빛으로 밝다/주인 닮은 뿔처럼 몸 기우 는 날은/금방 쏟아질 것 같은 잔등의 딱지가/철썩철썩 박 자를 맞추고/저 불그스름한 노을은/유순한 소의 엉덩짝을 산처럼 넘는다” (「잔등노을」 전문)
짧지 않은 시를 천천히 옮기면서, 그리고 다 옮긴 뒤 한 줄 한 줄 읽으면서, 시 읽기의 즐거움을 만끽했다. 다시 읽어봐도 좋구나! 내가 정연희의 「잔등노을」을 처음 본 것은 2017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응모작으로서였다. 발군이었다. 알고 보니 그는 늦은 나이에 등단하는 것이었다. 그러니만치 습작 세월이 꽤 길 터였다. 그런 경우, 시가 나무랄데 없지만 어쩐지 서글프게 농익어 있기 쉬운데, 「잔등노을」은 풋풋했다. 「잔등노을」에서 시인은 포착한 대상을 섬세한 터치로 정밀하게 묘사하는데, 건조할 정도로 감정이 들어가 있지 않다. 그럼에도, 아니, 그래서 시인이 그려내는 소의 훈김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아마 시인은 이 시를 쓰면서 몰아 지경으로 시의 풍경 속에 녹아들어가 있었을 테다. 그것이 시 쓰기의 즐거움일 테다. ... 중략 시집 원고에서 ‘새’라는 단어가 드물지 않게 눈에 띄는 데, 시 「채널 유목민」에도 “새들이 사라진 하늘/접힌 날개를 털자 후드득/가보지 못한 하늘이 소파에 떨어진다”는 구절이 있다. 그다음 구절이 “설산과 바다와 바람과/저지르지도 내려놓지도 못한 것들/바쁘게 채널을 사냥하며/얼마나 많은 시공간을 헤매고 다녔던가”이다. 시인이 즐겨 보는 프로는 <내셔널 지오그래픽>이나 <디스커버리> 같은 자연다큐인 듯하다. ‘설산과 바다와 바람!’ 시인이 이토록 외로울 정도의 자유를 목말라하는 건 너무도 오래도록 집과 직장에 붙박여 살아온 권태와 갑갑함에 연유하겠지만, 그에게 친화적이었던 자연이 아득히 멀어져서이기도 한 것 같다....중략 정연희는 매사 잘 보고 깊이 보는 게 체질인 것 같다. 시인한테 이로운 자질인 응시하고 성찰하는 루틴, 거기에 맵시 있게 말을 입히는 재능까지 있으니 무궁무진 쓸 일만 남았다. 얼마나 좋을까. 그러니 비빌 데가 있느니 없느니 기죽어서 기운 빼지 마시고, 쓰시라! 외로우니까 시인이랍니다.
― 황인숙 시인의 발문 중에서
시인은 언어로 허공을 더듬는 존재이다. 우화부전(羽化不全)을 향한 고통을 견디며 시간을 시로 채우고자 하는 정연희의 시가 발등에 떨어진 펭귄의 알처럼 뜨겁고 차갑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시인이지만 존재의 고투 속에 나비가 되어 생생하게 날고 있는 시를 먼저 만나는 기쁨이 크다. 언어의 혹사, 뒤틀린 포즈가 아닌 한없이 말랑한 맨몸으로 거친 바닥을 기어가는 체험의 언어, 빛과 어두움 사이에서 다시 일어나기 위해 또 무릎을 꿇는 모습이 든든하다. ― 문정희 시인의 표4 중에서
책속에서
마리골드와 촛불을 강에 띄워도 거품으로 얼룩진 소원들 능사의 옷을 닮은 차가운 웃음이다
비눗물 속에 잠긴 막대풍선 같은 종아리 힘껏 내리치는 빨래들의 비명은 저지대의 벽이 물러나 부서지는 소리
살아 있을 뿐 계층이 없는 가보처럼 물려받은 천직 아비는 태생 전부터 바닥에서도 더 낮게 기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허물을 벗어도 여전히 밑바닥
바닥과 근친인 너는 빙하를 거쳐 와 냉혈이다 쉿 소리를 내며 심장을 얼어붙게 만드는 얼음나라다
감기지 않는 동그란 눈과 사라진 청각 미립자를 찾는 혀는 몸속 가장 높은 카스트 배로 밀며 가며 낮은 곳만 파고드는 유전자
세상에 모든 꽃은 흙에서 핀다
「뱀꽃도 흙에서 핀다」 전문
고의였을까 실수였을까 시멘트 바닥에 찍힌 발자국 도장 누군가 공중으로 뛰어올라 사라진 흔적 같다
길이 늪이었음을 알고 모든 것을 밀어 넣었다가 끄집어냈을 물러선 발자국
미장공이 발라놓은 단 하루의 매끈한 관용, 실수를 받아주는 곳은 물렁하다
한 번 뛰어오른 다음 같은 모양으로 내려앉지 못하는 것은 흔적들이 어딘가로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남겨진 것은 낡은 신발만 가득한 세상, 제 것이 아닌 것 같아 늘 새롭게 찍고 싶은 엘리시움으로 떠난 발자국이다
구름 속을 밟고 싶었던 발을 두고 어디로 갔을까
판화처럼 찍힌 두 개의 늪에 어제 놓인 두 시의 하늘이 고여 있다
「늪 」 전문
침묵 속에는 더 많은 소리가 들어 있다
침묵을 모르는 너는 너무 많은 이름을 가졌어 생성과 소멸의 큰 눈으로 방황을 하지
어디에도 없고 어디에나 있는 푸른 춤사위를 만드는 조련사다
너의 길은 늘 특별한 순간들 직진의 습성이 휘돌아 오면 들판은 굽이치는 바다가 된다
초식의 생이란 흔들리고 휘어지고 뿌리가 뽑혀도 무수한 팔을 뻗어 부러지지 않는 세상을 기원하는 것이 전부다
고요는 고요한대로 별들은 내려와 수런수런 안으로 자란 흉터를 끌어안고 못다 쓴 일기를 쓴다
너의 길을 따라가다 울퉁불퉁해진 글씨체 옹이진 매듭을 풀어 가면 마디마다 움트는 꽃순들 웃는 소리 폭풍 소리로 쓸려간 곡절이 노래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