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는 글 창비시선이 출간된 지 49년이 지났고, 그사이 500권에 이르는 시집이 세상에 나왔다. 숫자의 규모가 어떤 인상을 줄 수는 있지만 그것만으로 이 오랜 시간의 의미가 온전히 파악되기를 기대하기란 당연히 어렵다. 한권의 시집이 담아낸 고유의 시간은 시인 한 사람의 시간을 초과한다. 시의 언어에는 시인 육체의 생물학적 시간을 넘어선 무언가가 들어 있는데, 창비에서 발간된 시집이라면 그것을 이 땅의 역사라고 말해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때 역사는 연대기적 시간과는 거리가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아래에서 꿈틀거리며, 현실의 깊이를 이루는 것은 물론이고 어떤 변화의 동력 또한 만들어내는 저류의 흐름이 실은 저 역사라는 말에 가까울 것이다. 창비시선이 500권에 이르렀다는 사실은 살아 있는 역사를 접한 생생한 기록이 500권의 시 언어를 통해 우리 앞에 차곡차곡 쌓여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읽는 이의 입장에서는 아주 풍부한 기억의 공유지를 만나게 된 것이다. 이 풍부한 공유지를 바탕으로 이 땅에서 삶을 가꾼 다양한 존재들과 새롭게 관계를 맺으며 우리의 삶을 다시 돌아볼 가능성이 지금 우리 앞에 놓였다. 저 기쁨을 나눌 방법을 고민하다 창비시선 500 기념시선집 『이건 다만 사랑의 습관』의 저자, 즉 창비시선 401부터 499까지를 펴낸 시인들의 힘을 빌렸다. 이들은 창비의 시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봐왔으며, 또 이들 각각의 안목을 빌려 빛나는 보물 하나씩을 발견할 가능성이 크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창비시선 전 시집에 수록된 시 가운데 가장 좋아하거나 즐겨 읽는 시편들을 추천해달라는 요청에 총 77명의 시인이 애송시를 보내주셨고 이 가운데 중복되는 작품과 시인을 추려내는 등 최소한의 선별 과정만을 거쳐 한권의 시선집을 묶었다. 73편의 시를 4부로 구성하고 순서를 배치하는 데는 박준 시인의 도움이 있었으며, 시선집의 제목 ‘한 사람의 노래가 온 거리에 노래를’은 신경림 시인의 『농무』(창비시선 1)의 수록작 「그 여름」의 시구에서 따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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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시선이 500번째 시집을 낸 것은 한국시의 저력을 보여주는 동시에 이 땅에서 당당하고 떳떳한 삶을 갈망해온 존재들의 힘을 증명한다. 그리고 아름다움이 삶과 삶을 잇는 튼튼한 다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오래전부터 믿어온 시인과 독자들이 그 여정에 큰 버팀목이 되었을 것이다. 이 힘들이 있기에 앞으로 창비시선과 한국시가 걸어갈 발걸음도 거뜬하리라 믿는다.
송종원 『창작과비평』 편집위원·문학평론가

잘 자라 우리 엄마
할미꽃처럼
당신이 잠재우던 아들 품에 안겨
장독 위에 내리던
함박눈처럼
―정호승, 「어머니를 위한 자장가」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