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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ㆍ12
한국어 판에 붙여서ㆍ14
엮은이의 말ㆍ17

제1장 쿠니노미야가家에 태어나서
-
유소년 시절

쿠니노미야의 조상, 나카가와노미야(中川宮) 아사히코 친왕(朝彦親王)ㆍ28
에도(江戶) 말기의 동란과 코우메이 천황(孝明天皇)의 갑작스러운 승하(崩御)ㆍ31
시마즈 가(島津家)에서 시집으로 오실 때는 정말 아무 것도 없었다ㆍ34
이마를 배 밑바닥에 문지르면서 용서를 빈 이와쿠라 토모미(岩倉具視)ㆍ36
아사히코 친왕의 미우타(御歌, 和歌)ㆍ39
옛 에도 시대를 연상시키는 정취 있는 지명(地名)ㆍ43
시부야 구(渋谷區) 미야시로 쵸(宮代町) 1번지의 집ㆍ46
집 안의 「바깥쪽」과 「안쪽」ㆍ48
가족 모두가 레코드를 들었던 즐거운 추억ㆍ51
화장실은 「오토우바(お東場)」 ─쿠게(公家) 말에 관해서ㆍ54
고레이덴(御霊殿, 제단)의 제물을 훔치고ㆍ57
우리 집안의 정월 요리ㆍ59
영양에도 신경을 써 주셨던 어머니ㆍ62
그러고 보니 제방(堤防)에 너구리 굴이 있었네ㆍ64
쇼와 8년(1933년) 카쿠슈인(学習院) 유치원, 쇼와 10년(1935년) 카쿠슈인 초등과ㆍ65
2·26 사건, 군인이 눈(雪)을 밟는 소리ㆍ67
자동차에 마음 설렘ㆍ69
해군사관(海軍士官)이었던 아버지와의 추억ㆍ71
내 집에 있던 개(犬)들ㆍ73
고우키(皇紀) 2600년ㆍ74
나의 손을 꼭 붙든 1학년인 황태자(皇太子)ㆍ76
태평양전쟁 개전과 스파이 소동ㆍ77
「朝鮮과는 사이좋게 지내라」고 몇 번이나 말씀하신 데이메이(貞明) 황후ㆍ78
파랗게 물든 풀에서ㆍ79
5월부터 10월 말까지 수영ㆍ80
아버지와 둘이서 보낸 에도사키(江戸崎)의 여름ㆍ81
쇼와 18년(1943년) 집 반소(半焼)ㆍ82
꿈에 보인 사쿠라 소우고로우(佐倉宗五郎)와 동급생ㆍ83

제2장 전쟁과 황족
-
나의 해군 시절

황족 남자는 군인이 되어야 했다ㆍ88
전쟁 반대에 노력한 황족들ㆍ90
할아버지 쿠니요시 왕(邦彦王)이 생존하고 계셨다면ㆍ92
하코네(箱根)의 별장 유황천(硫黃泉)ㆍ95
궁중 모(某) 중대사건ㆍ96
나의 아버지 아사아키라 왕(朝融王)에 대한 비판과 진실ㆍ99
아버지가 태워준 연합함대 기함(旗艦) 나가토(長門)ㆍ102
카쿠슈인(学習院) 기숙사는 낡아서 버팀목으로 지탱되고 있었다ㆍ105
준비(準備) 교육과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ㆍ106
수병(水兵)이 젓는 커터(小艇)로 에다지마(江田島)에ㆍ107
이노우에 시게요시(井上成美) 교장의 훈화(訓話)ㆍ109
상냥했던 할아버지 해군대장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 왕(伏見宮博恭王)ㆍ112
전하, 힘을 냅시다ㆍ113
은근한 두근거림 제1호ㆍ116
에다지마의 현악 사중주ㆍ117
「지휘관 선두(先頭)」의 정신을 함양하는ㆍ118
미센(彌山) 등산 경기ㆍ119
나는 특별하지 않다, 「젠장 지지 않겠다」라는 생각이 강했다ㆍ120
일본식 겸손은 국제적으로 마이너스 평가가 많다ㆍ123
전함 야마토(大和)의 추억과 오키나와 특공(沖縄特攻)ㆍ125
많은 장병의 목숨을 구한 이토우 세이이치(伊藤整一) 중장(中將)ㆍ129
「사관에게 자유재량(自由裁量)이 가장 중요하다」 이노우에 교장의 교육방침ㆍ131
해군사관학교 입교식의 소감ㆍ134
1호 학생의 설교(說敎)와 철권제재(鐵券制裁)ㆍ136
방공호(防空壕) 만들기, 그리고 적기 내습(敵機來襲)ㆍ140
해먹 넘버(해군 사관학교 졸업 석차)에 대하여ㆍ142
8월 6일의 섬광(閃光)과 폭발(爆發)ㆍ143
흰 보라색 버섯 구름, 땅울림ㆍ144
「왜 이렇게 된 겁니까」 아버지에게 터뜨린 분노ㆍ145
왜 황족이 전쟁을 만류할 수 없었던 것일까ㆍ148
「도죠 수상(東條首相)은 이제 죽은 자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ㆍ151
종전(終戰) 조기 성립을 위해 노력한 사람들ㆍ154
국민 대다수의 전쟁에 대한 열광 앞에ㆍ157
일본인이 반성해야 할 것ㆍ160
훌륭했던 일본인, 다이고 다다시게 해군 중장(醍醐忠重海軍中将)ㆍ164
구미(欧米)와 일본의 피해에 대한 반응의 차이ㆍ166
효율(效率)보다 정신(精神)만을 우선한 오류(誤謬)ㆍ168
특공(特攻) 돌격에서 살아남은 해군 장교의 일화(逸話)ㆍ173
시드니만 공격 후에 열린 해군장(海軍葬)ㆍ174

제3장 싸움이 끝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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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스쿠니 신사와 황적이탈

구제(舊制) 고등학교에서 신제(新制) 카쿠슈인(學習院) 대학에ㆍ180
반감(反感)을 사게 된 충격ㆍ182
기부(寄附)에 대한 생각ㆍ183
개전(開戰)의 책임을 마땅히 묻게 되어야 함ㆍ185
야스쿠니 신사는 왜 A급 전범(戰犯)을 합사(合祀)해 버렸는가ㆍ188
도쿄(東京) 재판에서 논의되지 않았던 세 가지 포인트ㆍ190
중요한 것은 국민 전체가 진심으로 명복(冥福)을 기도하는 것ㆍ194
「적군(賊軍)」도 모셔야 되는 것은 아니었나?ㆍ196
많은 비전투원(非戰鬪員)의 죽음은 막을 수 없었는가?ㆍ200
어제까지 경례(敬禮)를 한 사람이…ㆍ202
나의 일부(一部)를 만들어 주신 분들ㆍ203
황적 이탈(皇籍離脱)에 대해서ㆍ207
귀족제도(貴族制度)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될까ㆍ210
맥아더의 피아노ㆍ213
어머니와의 사별, 그리고 학창 시절의 끝ㆍ215

제4장 나의 회사원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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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주재의 추억

해운회사에 입사ㆍ220
주판을 튀기고 월급을 받는 즐거움ㆍ222
조선(造船) 스캔들에 연루(連累)ㆍ223
젊은 날의 일과 골프ㆍ225
음악을 배우고 싶다ㆍ227
나의 결혼ㆍ228
주재원(駐在員)으로 런던에ㆍ232
고고학(考古學)을 공부하고 있는 노미망인(老未亡人)ㆍ235
사투리는 중요한 역사 유산ㆍ236
윗사람의 시선(視線)으로 본 문화 사업ㆍ241
「Big Bang」과 「Big Bun」ㆍ243
국제 관계에서도 「일시동인(一視同仁)」을ㆍ245
영국에서 음악 수행(修行)ㆍ247
주말 시간을 보내는 방법 중 골프가 가장 쌌다ㆍ249
영국 요리는 맛이 없어?ㆍ252
장남의 탄생과 아버지의 죽음ㆍ255
가와사키 기선(川崎汽船) 이적(移籍)과 음대(音大) 다니기ㆍ257
칠레에서 스페인어 실패담ㆍ260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골프장ㆍ262
칠레의 희귀한 요리ㆍ265
카지노의 철칙(鐵則)ㆍ266
시간대로 가는 사람은 「세련되지 않다」ㆍ268
음대를 마치고ㆍ270
덴마크 근무 점묘(點描)ㆍ271
코펜하겐 시대에 음악을 통해 만난 사람들ㆍ279
모스크바에서 일본 항공기 추락사고ㆍ283
이 마사코(李方子) 씨를 방문하여ㆍ285
호주에서의 3년 반ㆍ287
임기응변(臨機應變)과 획일적(劃一的) 규칙ㆍ293
페어니스(Fairness)를 특히 소중히 하는 영국인ㆍ296
로타리클럽에서 「즐겁게 하자」ㆍ300
「좋아, 1달러」ㆍ302
친일(親日)의 남태평양 섬에서ㆍ303
산에는 녹음을, 유아에게는 예의범절을ㆍ304
평화 펠로를 키우다ㆍ307

제5장 이세伊勢의 신궁神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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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궁사로서 접했던 신도의 마음

파란 하늘의 천둥번개에 놀랐지만ㆍ310
대제(大祭)에서 노리토(祝詞, 축사)를 올리고ㆍ312
하카마(袴, 일본의 전통의상)와 나막신ㆍ314
한 시간 가량 무릎 꿇고 정좌(正坐)를 한 후ㆍ315
천궁(遷宮) 봉사ㆍ318
시원하게 밝은 분위기 속에서ㆍ319
정암(浄闇)에 무겁게 울리는 경필(警蹕)의 목소리ㆍ322
바람을 타고 비곡(秘曲)이 희미하게 들린다ㆍ324
두 가지의 불가사의한 사건ㆍ325
세계의 진정한 종교는 신령(神靈)을 믿는다는 공통점ㆍ328
현재(現在)를 옳고 밝게 살아 도착할 황천에 간다ㆍ329
자연 속에 가미 사마(神樣)가 계신다ㆍ332
신도(神道)를 단순한 애니미즘이라고 깔보는 것은 짧은 생각ㆍ333
국가 신도의 자의적(恣意的)인 생각에 분노를 느낀다ㆍ337
공존하고 함께 일해야 하는 신도와 불교ㆍ339
종교가 어우러져 자연 보호에 노력 하자ㆍ340
밀레니엄 세계 평화 정상 회의에서의 연설ㆍ343
퇴임의 감상(感傷)과 축복ㆍ349
싫은 것은 모두가 나누는 마음을ㆍ351
또 하나의 생각ㆍ354
강물 망망(茫茫)ㆍ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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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황족이 본 전쟁 : 황족으로 태어나 한 시민으로 살았던 쿠니 쿠니아키(久邇邦昭)의 파란만장한 삶 이용현황 표 - 등록번호, 청구기호, 권별정보, 자료실, 이용여부로 구성 되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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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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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황족이 전쟁을 만류할 수 없었던 것일까 …
천황에게 ‘전쟁 반대’를 건의한 황족들의 간언기록을 담은 구 일본 황족의 자서전 『소년 황족이 본 전쟁』

『소년 황족이 본 전쟁』은 일본 황족으로 태어나 황실의 의전과 생활방식으로 살다가 전후(戰後)에 GHQ(연합국총사령부)의 황적박탈조치로 평민이 된 쿠니 쿠니아키의 약 90년간의 인생역정을 정리한 자서전적인 책이다. 쿠니아키는 일본패전 후 황족에서 신민(臣民)으로 격하될 때까지 황족의 일원이었고 황실의 전범(典範)에 따라 살아왔기 때문에 황실 내부의 문화와 황족의 생활양식과 의전 등을 이 책에서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이 같은 기록은 일본인들에게도 낯선 이야기다.
쿠니아키는 15세 때에 일본해군에 징집되었으나 2년 후 일본의 패망으로 전쟁 참여는 피할 수 있었다. 본인은 전쟁을 싫어하였으며 황족으로서 전쟁을 막지 못한 황실의 책임을 이 책에서 묻고 있다. 또한 전쟁책임을 묻는 「동경재판」에서 천황의 전쟁책임을 추궁하지 않은 점도 지적하고 있다.
동시에 미군의 원폭투하와 대도시에 대한 무차별 융단폭격으로 수많은 민간인이 살상된데 대한 「미국의 인도적 범죄」와 침략전쟁에 따른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죄책감도 동경재판에서 논의되지 않은 점을 지적한다. 야스쿠니 신사에 A급 전범을 합사시킨 점에 대해서도 신랄히 비판하고 있다.
저자 쿠니아키는 일본황실의 4친왕가(4親王家) 중 가장 오래된 미야가(宮家)인 아사히코 신노(朝彦親王)가의 후손으로서 쇼와(昭和)천황의 조카벌이 되는 혈연관계이며 이 왕가의 이방자(李方子)여사는 그의 아버지의 사촌이다.
이처럼 천황가의 직계후손이 출생(1929년) 이후 이 책을 출간(2019년)하기까지 약 90년간의 인생역정을 구술한 것은 드문 일로서 일본인 독자들에게도 대단히 흥미로운 책으로 읽혀 졌다.
쿠니아키는 평민이 된 후에는 오랫동안 영국 등 유럽과 남미에서 해운업 관련의 직장생활도 했다. 또한 로타리활동에도 참여하여 2008년 세계대회에서 이동건 국제로타리회장을 처음 만나 알게 되었다. 그가 속해 있는 일본의 로타리지구가 한국에서 이동건 회장이 속한 로타리지구와 자매관계였던 인연도 있어 두 사람은 가까운 사이가 되었고 이 책이 일본에서 출판된 직후에 힌국에서의 번역출판을 제안, 이동건 회장이 엮은이로서 발간하게 되었다.

저자는 노년기인 1990년 천황의 허가(칙령)로 일본 신도(神道)의 본거지인 이세신궁의 대궁사(제주· 祭主)로 취임했다. 과거의 황족이었으므로 그를 선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이세신궁의 대궁사로 있을 때 세계 여러 종교의 공동활동이라는 의미를 가진 「종교와 환경보호동맹」 (ARC)의 국제대회에도 참여하였다. 자연보호 이외에도 세계평화 구축을 모색하는 운동에도 참여. 2000년 밀레니엄의 해에 코피 아난 유엔사무총장의 제창으로 세계 30개 종교단체 대표들이 뉴욕의 유엔 회의장에 모인 평화서미트미팅에서 세계평화를 달성하는 길을 함께 모색하자는 취지의 연설을 하기도 했다.

책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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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88~94] 황족남자는 원칙적으로 육군 또는 해군의 군인이 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황족이 정치에 간섭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군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특히 육군이 정치에 개입해서 만주사변을 일으킨 후 일본을 멸망의 갈림길 직전까지 가져간 것을 생각하면 뭐라고 할말이 없다 … 오히려 군인이 된 황족이 영향력을 발휘해서 군의 폭주를 방지하고 쇼와천황에게 협력하여 역사를 평화공존의 방향으로 바꿀 노력을 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전쟁반대에 노력하신 분도 계셨다. 어떤 일이 있어도 전쟁을 일으켜서는 안된다는 일기를 남긴 다카마츠 노미야(高松宮)등. 나의 아버지도 전쟁의 앞날에 비관적이었던 것 같지만. 그런데 왜 그 상황에서는 힘을 쓰지 못했을까.
[P. 113~114] 과업(課業)과 훈육(訓育), 모두 일대일(一對一)이어서 도저히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안 될 날의 연속이었다. 특히 영어 과목은 이노우에 교장이 전력을 다하는 과목의 하나로 영영사전(英英辭典)을 사용해서 수업 중에는 일본어 없이 영어로만 했다.
나는 유도나 검도는 모두 자신이 있었지만, 나에게만 교관 한 명과 교사 두 명이 교대하면서 상대를 해서, 잠시라도 움직임이 둔해지면 「전하 힘을 냅시다.(殿下、元気
[P. 190~192] を出されます)」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이 3인칭의 말투가 재미있지 아니한가. 정말 에쿠조스토(Exhaust, 기진맥진)했지만, 「요까짓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라는 생각으로 했다. 하지만 수영시간은 중학교 시절 수영부에서 단련된 수영 실력이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편했다. 다이빙도 좋아했지만, 평영으로는 나를 따라 잡을 수 없는 교관과 교원들은, 크롤로 바꿔서 나를 따라 잡기 위해서 헐떡거릴 때 내심 미소를 지은 적도 있었다.
나는 갑자기 6미터의 가설 발판에서 뛰어내리게 되었는데, 수영경기의 뛰어들기처럼 일단 깨끗이 뛰어들었지만 오르기가 너무 빠른 바람에, 허리가 삐끗해서 그날 밤에는 심하게 고열(高熱)이 났다. 다음날부터는 여름휴가가 시작되어 상경(上京)하기로 되어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열을 낮추기 위해 담요를 뒤집어쓰고 땀을 흠뻑 흘렸더니 여하튼 아침이 다가오니 열이 많이 내렸고, 이노우에 시게요시 교장에게 「휴가 다녀오겠습니다」라고 인사하고 상경했다. 15세의 소년이어서 할 수 있었던 것이었을까? 군의관인 대위 쿠로다(黒
田) 씨가 열심히 치료해 주셨다.
도쿄 재판에서 논의되지 않았던 큰 포인트 세 가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천황의 책임. 둘째 미국의 인도적 범죄. 셋째 일본의 식민지에 대한 죄책감이다.
우선 천황의 책임. 연합국 중 많은 나라에서 천황에게 책임을 물어야 된다는 목소리가 있었다. 천황이 맥아더를 첫 번째 만나러 갔을 때,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진다고 말한 것에 대해 맥아더가 감동해서 천황에게 책임을 묻는 것을 반대하였고, 키넌(극동전범재판소의 수석 검찰관 : 역자주) 검사들도 그 방향으로 움직였다고 알려져 있다. 어느 정도가 진실인지 모르겠지만, 천황을 일본 점령 정책에 이용하려고 한 것도 있겠다. 쇼와 천황의 평화 지향이라고 하는 것이 알려져 있던 것도 있을까.
사실 쇼와 천황은 전쟁에는 항상 변함없이 반대였고, 천황가의 전쟁 반대 신념은 「일본을 둘러싼 사방의 바다는 모두 동포라고 생각하는데 세상에 왜 이런 풍파가 일고 소란이 일어나는 것일까」라는 메이지 천황의 와카를 통해서 나타나기도 했다. 천황은 내각(內閣)이 전쟁으로 가는 것을 막으려고 하거나, 전쟁을 피하려고 노력했다. 반면에 입헌 군주제 헌법에 등지지 않으려는 것을 강하게 의식해서, 내각의 최종 결정에는 ‘No’라고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과부터 생각하면 전제군주적(專制君主的)으로 반대를 관철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당시의 그 상황을 돌이켜 보면 결국은 무리였던 것은 아닐까.
나는 성인이 되고나서는 1년에 여러 번 뵙고, 해외 주재로 나갈 때나 돌아올 때라든지, 가끔 폐하의 식사에 초대를 받아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인품, 즉 자신(自分)이라는 것은 없고, 남의 일만을 걱정하는 실로 드문 분이었다. 국민의 일만을 생각하고 또한 국민을 깊이 신뢰했던 마음을 생각하면, 나로서는 도저히 전쟁의 책임을 물을 수만은 없다.
그에 비해 이른바 A급 전범의 사람들은 개전을 최종 결정했다는 점에서 책임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나로서는 나치 인사들과 비교해 일말의 동정은 금할 수 없지만. 전형적인 일본인으로서 자기 의견을 강하게 주장하지 않고 주위의 상황을 둘러보며, 싸우면 진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결국 개전을 하게 되었다. 정상 참작의 여지는 없다고 할 것이다.
동시에 미래를 위해서도 일본인의 국민성에 대한 충분한 검토가 필요하다.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판단해야 한다. 따라서 그러기 위한 교육이 꼭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