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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어가는 말: 이 한 줄에 꿰이는 이야기들

■ 해제: 반세기 만에 다시 듣는 자유와 희망의 목소리

1. 민청학련
‘민청학련 사건’을 돌이켜 살펴보는 이유╻‘1974년’과 ‘민청학련 사건’이 갖는 의미
2. 가톨릭
기독교계로 번진 민청학련 사건의 파장╻이 나라 ‘양심선언’의 선구╻지학순 주교가 계기 만들고, 주교단이 앞장서고╻한국가톨릭, 한국 역사와 다시 만나다
3. 언론
언론인들, 치욕과 슬픔 딛고 언론자유의 수호자로╻자유언론운동의 비극적 결말, 새 변혁운동의 시발
4. 문인
글쟁이들이 길거리로 나선 뜻은?╻문인들, 죽음의 고비를 넘어 정치학습
5. 개신교
한국 개신교회, 현실 개입 속에 민중신학의 길로╻일본 체류 3인조가 뿌린 씨앗: ‘1973년 한국 그리스도인 선언’╻국내외 개신교인들의 연대╻멀리 독일 땅에서 꿈꾸는 ‘민생’과 ‘민족’과 ‘민권’
6. 가족운동
‘어머니’와 ‘아내’에서 ‘투사’로!╻시대의 비극을 예언한 구가협
7. 1974년 전후의 학생운동
서울문리대 10·2시위: ‘패배주의’를 넘어 ‘반유신의 횃불’로!╻김상진, 자신을 바쳐 ‘피의 심판’을 예고하다╻긴조9호 시대, ‘유신정권 대 학생운동’의 사생결단
8. 전태일의 분신
전태일, ‘개발의 피해자’에서 ‘역사의 주체’로!
9. 재야의 공동전선
이 나라 재야의 등장, ‘민수협’╻재야의 진화, ‘민주회복’ 기치 내걸고 조직운동으로!╻재야의 확신, ‘연대’와 ‘항쟁’╻1970년대의 정점에서
10. 부문 운동들
자유언론, 민주·민족언론으로 거듭나다╻민청협, 어깨동무하고 난세를 넘다╻“오늘날 교육의 실패는 어디에서 오는가?”
11. 10·26 이후
‘새로운 출발’은 어떻게 오는 것일까?
12. 에필로그: 1974년을 ‘현재화’하기 위하여

■ 자료편

□ 1974년 이전
1-1. 서울시내 각대학 학생회장 등, ‘공동결의문’(1970.11.20)
1-2. 고 전태일 선생 추도예배 참례자 일동, ‘헌신고백문’(1970.11.25)
2. 민주수호국민협의회, ‘민주수호선언’(1971. 4.19)
3. 한국 기독교 유지 교역자 일동, ‘1973년 한국그리스도인 선언’(1973. 5.20)
4.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학생회, ‘선언문’(1973.10. 2)
5.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문제협의회, ‘인권선언’(1973.11.24)
6. 한국그리스도인 유지일동[독일], ‘재독 한국그리스도인의 선언’[바일슈타인선언](1973. 11.25)
7. 장준하 등, ‘개헌 청원운동 취지문’(1973.12.24.)

□ 1974년
8. 이희승 등 문인 61명, ‘민주회복을 위한 개헌운동은 당연한 권리’(1974. 1. 7)
9. 민주사회건설협의회, ‘민주사회 건설을 위한 선언서’(1974. 3. 1)
10-1.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민중·민족·민주 선언’(1974. 4. 3)
10-2.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결의문’(1974. 4. 3)
10-3.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격문’(1974. 4. 3)
11-1. 지학순 주교, ‘나의 견해’(1974. 7.15)
11-2. 지학순 주교, ‘양심선언’(1974. 7.23)
11-3. 성직자 일동, ‘성명서’(1974. 8.26)
11-4.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전국평신도협의회, ‘결의문’(1974. 9.11)
11-5. 구속자를 위한 신구교 연합기도회 주관단체 일동, ‘우리의 선언’과 ‘우리의 결의’(1974. 9.22)
11-6.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 ‘시국선언’(1974. 9.26)
11-7.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 ‘제2차 시국선언’(1974.11. 6)
11-8.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 ‘사회정의 실천선언’(1974.11.20)
11-9.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 ‘제3 시국선언’(1975. 2. 6)
11-10.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 ‘민주·민생을 위한 복음운동을 선포한다’(1975. 3. 10)
12-1. 동아일보사 기자 일동, ‘언론자유수호선언’(1971. 4.15)
12-2. 동아일보사 기자 일동, ‘언론자유수호 제2선언문’(1973.11.20)
12-3. 동아일보사 기자 일동, ‘언론자유수호 제3선언문’(1973.12. 3)
12-4. 전국출판노동조합 동아일보사지부 발기위원회, ‘발기문’(1974. 3. 6)
12-5. 동아일보사 기자 일동, ‘자유언론실천선언’(1974.10.24)
13-1. 조선일보사 기자 일동, ‘언론자유선언문’(1971. 4.17)
13-2. 조선일보사 기자 일동, ‘언론자유회복을 위한 선언문’(1974.10.24)
14.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자유실천문인협의회 101인선언’(1974.11.18)
15. 강문규 등 66명, ‘한국 그리스도인의 신학적 성명’(1974.11.18)
16. 민주회복국민회의, ‘국민선언’(1974.11.27)
17-1. 구속자 가족 일동, ‘둘째번 결의문’(1974.11.21)
17-2. 구속자가족협의회, ‘이른바 민청학련사건에 관한 호소문’(1975. 1.28)
17-3. 구속자가족협의회, ‘성명서’(1975. 2.19)

□ 1974년 이후
18. 김상진, ‘양심선언문’(1975. 4.11)과 ‘대통령께 드리는 공개장’(1975. 4.10)
19. 신현봉 등 신·구교 성직자 8인, ‘원주선언’(1976. 1.23)
20. 함석헌 윤보선 김대중 등, ‘민주구국선언’(1976. 3. 1)
21. 윤보선 등 10인, ‘민주구국헌장’(1977. 3.22)
22-1. 동아·조선 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민주·민족언론 선언’(1977.12.30)
22-2.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진정한 민주·민족언론의 좌표’(1978.10.24)
23. 민주청년인권협의회, ‘창립선언’(1978. 5.12)
24. 해직교수협의회, ‘동료교수들에게 보내는 글’(1978. 4. 13)
25. 김두진 등 전남대 교수 11인, ‘우리의 교육지표’(1978. 6.27)
26. 민주주의국민연합, ‘민주국민선언’(1978. 7. 5)
27.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 ‘민주구국선언’(1979. 3. 1)
28-1.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 ‘성명서’(1979.11.12)
28-2.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등, ‘나라의 민주화를 위하여’(1979.11.13)
28-3. 통대선출저지 국민대회, ‘통대 저지를 위한 국민선언’(1979.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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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청학련 50주년에 다시 듣는 세상을 바꾼 목소리들 이용현황 표 - 등록번호, 청구기호, 권별정보, 자료실, 이용여부로 구성 되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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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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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강압과 폭력으로도 노도와 같이 소용돌이치며 흐르는
이 도도한 물결을 결코 막지 못하리라”
‘민청학련 사건’을 돌이켜 살펴보는 이유

“이러한 농민 수탈체제의 수호신은 바로 1인독재 체제와 정보·폭압 정치이다. 5년 전의 3선개헌으로부터 노골화된 영구집권의 야욕은 국민의 기본권을 유린하는 한편 이에 항의하는 학생·지식인·종교인 등 수많은 애국인사를 체포·구금·고문·투옥하는 만행을 서슴지 않고 있다. 소위 유신이란 해괴한 쿠데타·국가비상사태와 1·8조치 등으로 폭압체제를 완비하여 언론을 탄압하고 학원과 교회에 대한 억압을 더욱 가중시킴으로써 비판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있다. 비판할 수 없는 정치, 이것은 과연 한국적 민주주의인가? -‘민중·민족·민주 선언’(1974.4.3) 중에서”

1974년 4월 3일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으로 약칭) 명의로 발표된 ‘민중·민족·민주선언’의 일부이다. 민청학련 사건은 이른바 10월 유신(1972.10.17) 이후 1년 반 동안의 침묵을 걷어낸 ‘본격적인 반유신(反維新) 저항운동의 신호탄’인 동시에 ‘유신체제 몰락의 시발점’이었다. 실제로 이 선언의 주역, 곧 민청학련 세대의 학생운동가들은 상당수가 그 이후 한국 사회의 민주화운동에 자신을 바쳤다. 가깝게는 박정희 유신독재의 철폐에, 길게는 이 나라 민주주의의 회복과 민족통일의 대열에 기꺼이 투신했다.
이 책이 소개하는 기록들을 들여다보면 1974년 유신 독재 체제하의 정치·사회 현실이 보이고, 이에 반대하고 자유를 수호하고자 하는 저항·변혁 운동의 생동감이 느껴진다. 당시의 절실한 마음, 삶 전체를 거는 결단, 수난 뒤에 마침내 맞게 될 새날의 기대 등이 담긴 기록들이다. 이 책이 반세기 전의 기록을 담고 있지만, 옛날이야기가 아닌 것은 오늘에도 여전히 유효한 메시지들이 곳곳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반세기가 지나는 동안 세상의 어젠다도 많이 바뀌어 이제 평화와 생명의 가치가 우리 지향의 가장 윗자리를 차지하는가 싶더니 근자에는 민족의 통일을 염두에 둔 평화의 가치마저 갈 곳 몰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렇게 푯대가 흔들리는 사이에 민중들이 모든 짐을 홀로 지고 가는 양상이 되고, 양심과 표현의 자유는 민주주의의 가장 취약한 고리임이 새삼 분명해졌다. 그러나 세상이 그렇게 바뀐 것처럼 보일수록 민족의 재결합을 향한 간절한 마음만은 오히려 우리 정서의 가장 밑바닥에서 더욱 힘차게 고동치고 있음을 새삼 경험하는 것도 사실이다. 이 의미를 돌이켜 봄으로써 시간을 뛰어넘어 오늘에까지 살아 있는 가치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1970년대 ‘시대의 목소리’를 돌이켜 다시 듣고, 거기서 ‘역사적 현재’가 만들어진 내력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유신체제 저항에 연대한 모든 이들,
세상을 바꾼 그들의 목소리는 현재에도 메아리치고 있다

“그리스도교 사랑과 관용의 질서는 그 관용 자체를 파괴하려는 위와 같은 독재체제나 전체주의만은 관용할 수 없는 것이다”
종교계, 학생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건네다

“우리는 우리의 기도에서 이 땅에 인권회복 민주회복을 하느님의 소명으로 확인하였다. 인권회복은 정치권력의 무한한 횡포로부터 우리의 기본적 인권을 찾자는 것이다. 이 땅의 인간회복은 인간다운 삶을 보장받자는 것이며, 이 땅의 민주회복은 독재정치의 굴레로부터 해방되자는 것이다. 이것은 정치적 요구가 아니라 인간적 요구이다. -‘제3 시국선언’(1975.2.6) 중에서”

민청학련 학생들은 가톨릭교회로부터도 큰 도움을 받았다. 이들은 당시 이른바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으로 1년 반을 복역하고 나와 있던 서울대 운동권의 선배 조영래(1947~1990)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그는 김지하(1941~2022) 시인에게, 김지하는 다시 가톨릭 원주 교구의 지학순 주교(1921~ 1993)에게 요청해 상당히 큰 액수의 돈을 받았으며, 이 돈은 역시 역순으로 시위 준비 중인 학생들에게 전달되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런 ‘거물’ 정치인 또는 종교인들이 학생들의 시위에 자금을 보탠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이른바 거사 자금을 준 인사들이 그런 지원에 주저한 흔적은 별로 발견되지 않는다. 오히려 당시 학생들의 행동이야말로 정의롭고 크리스천 정신에 합당하다는 판단이 있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1970년대 중반의 시대정신이자 하느님의 선교(Missio Dei)라는 확신이 그들의 손을 잡아끌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언론의 자유가 어떤 구실로도 침해되어서는 안 되며 즉각적이고 완전하게 회복되어야 한다고 확신한다”
언론인들, 치욕과 슬픔을 딛고 언론자유의 수호자로

“작게는 뉴스원의 봉쇄로부터 기사의 경중과 보도 여부에까지 외부의 손길이 미쳤고, 이른바 정보기관원의 ‘상주’가 빚어내는 불합리한 사태는 일선 언론인인 우리들에게 치욕과 슬픔을 안겨 주었다. 이에 우리는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언론의 자유가 어떤 구실로도 침해되어서는 안 되며 즉각적이고 완전하게 회복되어야 한다고 확신한다. 기관원의 상주나 출입은 허용될 수 없으며 신문 및 방송의 제작판매의 전과정은 언론인의 양식에 따라 자유롭게 이루어져야 한다. 아울러 우리는 오늘의 언론위기의 책임을 전적으로 외부로만 전가하려 하지 않으며 권리 위에 잠잔 스스로의 게으름을 반성하려 한다. -‘언론자유수호선언’(1971.4.15) 중에서”

1971년 4월 15일 ‘언론자유수호선언’[자료 12-1]이 ‘동아일보사 기자 일동’의 이름으로 채택·공표되었다. 이는 일선 언론인으로서의 고해성사이기도 했고, 언론 행위의 기본선으로 돌아가 스스로 언론자유를 회복하겠다는 다짐이기도 했다. 가장 상징적인 행위는 기관원의 사내 상주 또는 출입에 대한 거부였다. 동아일보사도 기자들의 이런 뜻에 힘입어 정보기관원의 철수를 요청했고, 그날로 기관원은 ‘일단’ 사라졌다. 이 선언은 전 언론사에 파장을 미쳤다. 4월 16일 한국일보 기자들이, 17일 조선일보 기자들을 포함해 대한일보, 중앙일보 기자들이 비슷한 취지의 선언문을 채택하며 언론자유 수호의 의지를 다졌다. 그 모든 활동은 제3공화국 이후 한국 사회에 새로 출현한 지식인 운동의 한 양상이었다. 굳이 범주를 나눠보자면, 대학생과 종교인에 이어 세 번째로 등장한 지식인 집단이었다. 그 선언의 이름이 ‘수호’이건 ‘실천’이건 그 운동은 일단 헌법상 규정된 양심과 표현의 자유에 기댄 것이었다. 다시 말해, 이들의 자유언론운동은 그 기본 성격에 있어서 조정과 타협을 전제로 하는 자유주의적(liberal)인 것이었다.

“어떠한 탄압 속에서도 계속될 인간 본연의 진실한 외침”
문인들, 서울 한복판에서 외치다

“오늘날 우리 현실은 민족사적으로 일대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사회 도처에서 불신과 불의, 부정과 부패가 만연하여 정직하고 근면한 사람은 살기 어렵고 거짓과 아첨에 능한 사람은 살기 편하게 되어 있으며, 왜곡된 근대화 정책의 무리한 강행으로 인하여 권력과 금력에서 소외된 대다수 국민들은 기초적인 생존마저 안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이러한 모순과 부조리는 반드시 극복되어야 한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 101인선언’(1974.11.18.) 중에서”

이 선언문의 제목은 ‘자유실천문인협의회 101인 선언’[자료 14]이었다. 100인이 아니라 거기에 점 하나 더 찍듯이 굳이 한 명을 보탠 것도 글의 재미라고 해야 할지…. 그러나 본문에 이어지는 결의의 내용은 결코 간단치 않았다. 즉, △김지하 시인 등 긴급조치 구속자들의 석방, △언론·출판·집회·결사 및 신앙·사상의 자유 제한 불가, △서민 대중의 생존권 보장 및 노동 관련 법 개정, △유신헌법의 개정 등이 그것이었다. 헌법상 절대적 자유권의 보장과 노동권의 확보는 물론이고 유신헌법의 개정까지 나아갔으면 할 수 있는 말은 다 한 셈이었다. 그것도 아주 쉬운 말로! 문인들의 움직임에서 이런 앞선 흐름들과 조금 다른 점은, 그것이 출범의 장소를 일부러 길거리, 그것도 서울 한복판 광화문 네거리를 선택했다는 점이었다.

50년 전의 말과 그 말의 뜻을 오늘에 현재화하기 위해서는…

50년 전의 말과 뜻을 되살리는 방법은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는 일이다. 우리는 이미 유신 7년의 암흑기와 신군부 8년의 시련기 동안 많이들 단련되었다. 그런 긴 겨울을 겪어본 사람만의 감각과 자신감도 나름대로 갖추었다. 1970년대에 점점이 또는 무리 지어 우리의 길을 향도하던 그 모든 선각자의 별빛들을 다시 한번 되새기면서 2020년대의 길을 찾다 보면 판도라의 상자 속에 갇혀 있던 희망이 마침내 어느 날 불쑥 우리 앞에 현실이 되어 그 모습을 나타낼 것이다.

책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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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는 우리를 오늘의 사태에 이르게 한 다른 모든 살인자들을 책하기에 앞서 우리들 자신에게 엄혹한 비판을 가하지 아니할 수 없다. 우리는 이 비인간적인 현실을 바로 우리 이웃에 두고도 다분히 소시민적인 안일에 빠져 있었으며, 이 어둡고 더러운 현실을 투쟁하는 데 철저하지 못하였다. 우리는 현 정부의 인간 부재의 사이비 근대화 정책을 막아내지 못하였고, 업주의 횡포와 노총의 범죄적 무시주의를 방치하고 말았으며, 지식인의 비열한 현실도피주의를 시정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우리는 참담한 심정으로 아래와 같이 결의한다.
우리는 장기적으로 근로자, 농민 등 모든 빈민의 생활 실태를 조사하고 숨겨지고 있는 참상을 전 사회에 고발하며 그들의 자기 보존을 위한 투쟁을 격려 지원한다. - 자료 1-1. 서울시내 각대학 학생회장 등, ‘공동결의문’(1970.11.20)
이 역사적인 위기에 처하여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다시금 다음과 같이 우리의 신앙을 고백한다.
(1) 우리는 역사의 주인이시며 심판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이웃을 대신하여 고난을 겪고 있는 눌린 자들이 자유를 얻도록 기도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다고 믿는다.
(2) 우리는 우리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가 유대 땅에서 눌린 자들, 가난한 자들, 멸시받는 자들과 함께 사신 것처럼 우리도 그들과 운명을 같이 하면서 살아가야 한다고 믿는다. (…)
(3) 우리는 성령이 우리 성품을 변화시키며 새로운 사회와 역사를 창조하시는 데 우리가 참여할 것을 요구하신다고 믿는다. 이 영은 메시아의 나라를 위한 영으로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회적, 정치적 개조를 위하여 싸울 것을 명령한다. - 자료 3. 한국 기독교 유지 교역자 일동, ‘1973년 한국그리스도인 선언’(1973. 5.20)
오늘 우리는 전 국민 대중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이 참혹한 현실을 더 이상 좌시할 수 없어 스스로의 양심의 명령에 따라 무언의 저항을 넘어서 분연히 일어섰다. (…) 학우여! 자유와 정의, 진리는 대학의 생명이다. 오늘 우리는 너무도 비통하고 참담한 조국의 현실을 직시하여, 사회에 만연한 무기력과 좌절감, 불의의 권력에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한 모든 패배주의, 투항주의, 무사안일주의와 모든 굴종의 자기기만을 단호히 걷어치우고 의연하게 악과 불의에 항거하여 이 땅에 정의, 자유, 그리고 진리를 기어코 실현하려는 역사적인 민주 투쟁의 첫 봉화에 불을 붙인다. 절대로 굴복하지 않고, 절대로 타협하지 않고, 절대로 주저하지 않고 과감히 항거하는 우리의 투쟁은 더없이 뜨거운 정의의 불꽃이며, 더없이 힘찬 민중의 아우성이며, 더욱이 고귀한 민족생존의 활로이다. 우리의 외침을 억누를 자 누구냐? - 자료 4.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학생회, ‘선언문’(1973.10.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