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주인, 조선시대 물자와 정보를 나르던 사람들 2. 서울과 지방의 연락사무소, 경주인의 역할 상경한 지방민들의 든든한 지원군 양반관료의 비공식 수행비서 발로 뛰는 우체부, 경방자 법도 지켜 주기 힘든 부세대납 업무와 과외의 역 3. 하급관료보다 많은 경주인 월급, 어떻게 마련됐을까? 4. 조선 후기 경주인권은 왜 그렇게 비쌌을까? 5. 19세기 민란과 경장의 시대, 경주인의 생존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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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과 지방의 매개체, 경주인 이용현황 표 - 등록번호, 청구기호, 권별정보, 자료실, 이용여부로 구성 되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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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3158820
951.5 -25-11
[서울관] 인문자연과학자료실(열람신청 후 1층 대출대)
이용가능
B000123317
951.5 -25-11
부산관 종합자료실(1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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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책소개
※ 전통생활사총서 한국 전통시대의 다양한 역사적 현장과 인물 속에 숨어 있는 사례들을 하나하나 발굴하여 재구성해 소개한다. 당시 사람들의 일상 속을 세밀하게 파악하여 그간 덜 알려져 있거나 알려지지 않았던 다양한 소재를 대중에게 흥미롭게 전달한다. 특히 중앙정부 중심의 자료가 아닌 민간에서 생산한 기록물을 통해 내용을 재현하는 만큼 각 지역의 살아 있는 역사적 사실을 이해하는 데 기여한다. 매년 해당 분야 전문가를 집필자로 선정하고 지속적인 피드백을 통해 원고의 완성도를 높였다. 본 총서를 통해 생활사, 미시사, 신문화사의 붐이 다시 일어나길 기대한다.
경주인(京主人)은 고려시대 이래 서울과 지방의 연락사무와 부세행정을 맡아보던 향리의 일종으로, 경저리(京邸吏)로도 불리던 자들이다. 임진왜란 이후 향리를 뽑아 올리는 대신, 중앙관서에서 도성민을 뽑아 값을 주고 부리는 관행이 나타났으며, 대동법 시행 이후로는 선혜청에서 경주인들에게 역가(役價)를 지급해 주고 관료-부세행정을 지원하는 시스템이 마련되었다. 미천한 신분으로 정부관서와 지방관의 심부름을 수행하던 경주인들은 점차 로비를 통해 지방수령에게도 역가를 받아 내는 한편, 아전들과 결탁해 고리대를 놓음으로써 자체 수익을 늘려 갔다. 이에 경주인들은 19세기 민란의 원흉으로 지목될 만큼 수탈성을 드러내기도 하였지만 갑오개혁을 거쳐 20세기 초까지 경제적 부를 누리며 신분상승을 모색해 갔다. 19세기 주요 모순 가운데 하나였던 경주인이 이처럼 우리 역사 속에 장기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관료제의 외곽에서 관료제를 지탱해 온 실질적인 존재들이 바로 이들이었기 때문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 조선 사람들은 과연 어떻게 살았을까? 우리에게 ‘조선’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것은 보통 양반이나 선비의 모습이다. 그러나 조선에는 양반과 선비뿐만 아니라 상인이나 농민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살았다. 그러니까 조선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양반들의 삶뿐만 아니라, 상인과 농민들의 삶도 함께 바라봐야만 한다. 또 양반들의 삶 역시도, 중앙정치에서의 활동만으로는 충분히 이야기될 수 없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실록이나, 『승정원일기』처럼 국가가 편찬한 관찬 기록에서는 이들의 일상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다행히도 개인의 일기나 서간집 등 다양한 사적 기록이 발굴됨에 따라 우리는 이들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 일기나 서간집을 남긴 사람들이 주로 식자층에 속하기 때문에 일정 부분 한계는 있지만, 그러한 식자층이 자신의 이야기를 남기면서 주변의 이야기도 남겨 왔기에, 우리는 그동안 알기 어려웠던 주변의 삶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전통생활사총서는 이처럼 조선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삶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 책들을 따라서 읽어 나가다 보면 우리가 몰랐던 조선 사람들의 삶을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고려에서 조선 말에 이르기까지 관료 행정을 지원하며, 밖으로 중앙관료·지방수령과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안으로 경제적 이권을 획득해 갔던 경주인의 실체에 대해 살펴본다. 근래에 들어 조선시대 고문서와 일기자료의 발굴로 경주인의 업무와 생활상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들이 다수 공개되었고, 저자 최주희 교수는 기존 연구들에서 미처 밝히지 못한 경주인의 존재 양상과 그들의 생활상에 대해 이 글을 통해 소개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2장에서 기존 연구에서 소개된 경주인의 역할을 다양한 자료를 통해 새롭게 조명해 보는 한편, 그간 그 존재가 자세히 거론되지 않았던 경방자의 역할에 대해서도 검토한다. 3장과 4장에서는 대동법 시행 이후 마련된 법 조문과 지방 군현의 재정자료를 분석해 경주인의 경제적 기반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추적한다. 마지막으로 5장에서는 경주인이 19세기 민란의 원흉으로 지목되면서 근대이행기 새로운 생존전략을 모색하게 되는 역사적 경로를 살펴본다. 저자는 이와 같은 작업이 소기의 성과를 거둔다면, 고려와 조선에 걸쳐 장기 지속한 경주인이라는 존재가 관료제의 외곽에서 관료제를 지탱해 온 숨은 주역인 동시에, 19세기 부세 문란의 조종자로서 관료제를 뒤흔든 부패의 온상이었음을 종합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리라 생각한다.
책속에서
[P.21] 경주인은 관료 및 각사 서리, 주인들의 내왕이 잦은 도성 안팎에 거처를 두고 생활했으며, 별도로 경비와 방자를 두어 숙박업과 연락사무에 필요한 일을 이들에게 분담시켰다.
[P. 52~53] 이처럼 조선시대 경주인은 도목정사를 통해 인사 발령이 행해지면, 지방관의 부임에 따른 각종 물력을 제공하고 신임 수령의 전직 관서에 예목을 지급해야 했다. 또 수령이 본읍에 내려갈 때 경유지의 고을 객사와 역참에서 숙식과 마필을 때맞춰 제공받을 수 있도록 분주한 행정절차와 문서수발을 감당해야 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양반관료와 사족들의 침탈이 자행되었다는 점이다.
[P. 102] 이처럼 경주인들의 부세 행정 및 관료 행정에 대한 공식, 비공식 지원의 대가로 이들의 역가는 점차 중앙 및 지방재정에 높게 책정되어갔다. 이것은 경주인의 경제적 위상을 높이는 계기가 되어 경주인권은 하나의 권리로 매매되기까지 했다. 다음 장에서는 조선 후기 경주인의 권리가 어떻게 매매되고 있었는지 그 구체적인 양상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