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내면서 위만의 정변과 위만조선 건국 고구려사에 보이는 정변과 역사적 의미 고구려 차대왕의 정변과 초기 왕위계승의 원칙 『일본서기』에 보이는 백제의 정변에 대한 고찰 백제 초기 왕위계승과 정변 신라 상대의 왕위계승과 정변 신라 하대의 쿠데타와 대외교섭 발해 역사의 변혁 주 참고문헌 그림목록
한반도의 고대사회에서 벌어졌던 수많은 쿠데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 8인의 역사학자와 함께 고대사에 나타난 권력 교체의 현장, 그 역사의 순간으로 떠난다! 우리의 현대사에서 ‘쿠데타’는 군부 정권의 기억, 그리고 민주화운동이라는 키워드와 단단히 얽혀 있다. 두 세대를 아우르는 동안 정치와 사회 전반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고, 시민들에게는 트라우마를 남겼다. 그러나 쿠데타는 현대사에서만 볼 수 있는 이슈가 아니다. 권력 구조를 둘러싼 정치적 변화의 중심에는 늘 역사의 면면에 숨어 있거나 드러난 쿠데타, 즉 정변이 있었다. 역사학자 8명의 공동 연구 결과로 내놓은 『고대사회에도 쿠데타가 있었는가?』는 이 같은 맥락 아래 고조선부터 발해까지 한국 고대사의 주요 사건들을 ‘쿠데타(정변)’라는 관점에서 조명함으로써 고대사의 권력 전복 과정의 맥락을 톺아 봄과 동시에 그것이 오늘 우리 사회에 주는 교훈을 심층적으로 분석한다. 이 책은 우선 고대 한국사에서 벌어진 권력 교체의 사례를 연구자별로 철저히 파헤친다. 위만의 정변과 위만조선 건국, 고구려사에 보이는 정변과 역사적 의미, 고구려 차대왕의 정변과 초기 왕위계승의 원칙, 『일본서기』에 보이는 백제의 정변에 대한 고찰, 백제 초기 왕위계승과 정변, 신라 상대의 왕위계승과 정변, 신라 하대의 쿠데타와 대외교섭, 그리고 발해 역사의 변혁 같은 여러 사건이 사료 고증과 최신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면밀하게 다뤄진다. 특히 당시의 사회적, 정치적 맥락을 파악하는 데 중점을 두어 배경과 결과를 심층적으로 탐구한다. 이 과정에서 독자들은 정변이 단순히 권력의 전복에 머무르는 게 아니라 한 사회의 구조와 방향성 및 시대정신을 재편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인지하게 된다. 예를 들어 위만조선의 건국 과정에서 드러난 내부 권력 구조의 변화는 단순한 권력 투쟁을 넘어 한국사 최초의 왕조 교체로 기록되는데 이는 현대의 정치 체제와 흥미로운 유사성을 보여 준다. 또한 신라 하대의 쿠데타는 사회 질서의 해체와 재구성의 과정을 보여 주며, 발해의 변혁은 동아시아 국제 질서 속에서 독립적 정체성을 구축하려는 시도로 읽을 수 있다. 그러므로 단순히 과거사의 개별 사건을 돌아보는 데 그치지 않고 독자들이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데 필요한 시각을 제공해 줄 것이다. 이 책의 저자 대표인 김희만 교수는 저자의 말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고대사회에서 ‘쿠데타[coup d’Etat]’라는 용어가 통용되었을 리 만무하기에, 때로는 ‘정변(政變)’이라는 개념으로 이를 순화하여 사용하였다. 이러한 사정은 각 시대를 연구하는 데 수반되는 어려움 중 하나로, 역사학자들이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는 배경이기도 하다. 이제 그 번뇌의 산물 일부를 단행본으로 발간한다. 미미하게나마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를 위한 하나의 다리를 마련한 셈이다. 역사, 특히 고대사에 관심이 많은 독자에게 일독(一讀)을 권하고 싶다.” 이 책을 역사서 애독자 및 역사 연구자, 정치학이나 사회학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에게 권하는 배경이다. 책에 소개된 고대사의 정변을 통해 오늘날의 정치적 문제를 반추하고 이로써 과거와 현재를 잇는 역사적 연속성이라는 통찰 아래 역사란 ‘배우는 것’이 아닌 ‘오늘을 움직이는 힘’이라는 것을 재인식하는 계기로 삼길 바란다.
책속에서
위만이 고조선을 무너뜨린 것은 기원전 195년에서 오래되지 않은 시점일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위만이 정변 때 한나라가 10도로 나누어 쳐들어온다고 할 수 있는 주발이 연 지역을 평정하던 기원전 195년 말~194년 초 사이로 보기도 한다. 주발의 군대가 물러간 다음에는 허위 보고가 통할 수 없기에 위만의 정변 시기를 이 시기로 한정해 보는 것이다. 위만의 정변 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 또 다른 단서는 위만조선이 성립하고 한나라와 맹약을 맺은 시기가 ‘효혜고후시(孝惠高后時)’라는 사실이다. 『사기』에서 ‘효혜고후시’는 혜제(惠帝)의 재위기간인 기원전 194~188년에만 나타나는 용법이다. 따라서 위만의 정변은 기원전 188년 이전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특히 요동태수가 연왕을 거치지 않고 맹약을 맺었다는 점에서 연왕이 연소(年少)한 시기이고 한나라가 대외적으로 안정된 시기인 혜제 3~4년인 기원전 192~191년으로 좁혀서 이해하기도 한다. 위만이 이 시기에 한나라와 외신관계를 맺었다면 위만조선이 성립한 것은 늦어도 기원전 191년일 것이다. 따라서 위만이 노관의 반란 시점에 망명했다면 불과 1~4년 사이에 고조선이 멸망하고 위만조선이 성립한 것이다. _<위만의 정변 과정과 위만조선 건국> 중
정변의 명분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주몽은 천제의 아들이라는 점이 중요하게 작용했으며, 유리왕은 선대왕과 혈연적으로 이어져 있음을 보여 주는 증거로 ‘칼’을 들었다. 이는 주몽이 활을 통해 송양을 제압해 나가는 ‘무력’과도 통한다. 즉, 신성한 천손이라는 혈연성과 ‘활과 칼’이라는 무력 두 가지가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왕실의 권위와 현실적 힘, 두 가지를 갖춰 나가던 모습을 반영한 것이라고 하겠다. 민중왕 대부터 정변의 명분으로 ‘유소’, ‘노쇠’, ‘폭정’, ‘과도한 수취와 노역’ 등을 내세우기 시작했다. 점차 통치 대상인 백성을 향해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한 마디로 초기에 신화에 가탁하거나 자격을 논했지만 이후 점차 민생 등 현실 문제로 이어졌음을 엿볼 수 있다. 후기에는 명분을 특정하기 어렵다. 정변 주도 세력이 바뀌어 가는 모습도 어렴풋이 확인된다. 전기에는 혈연을 매개로 한 족적(族的) 기반이 강했다. 차대왕 대는 관나·환나·비류나 등 다수 부세력들이 결집하는 모습을 보인다. 신대왕 대는 지인(至仁)의 가치를 언급하고 있는데, 사상적으로 이를 따르는 세력과 연대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고국천왕 대 신진인사인 을파소의 국상 임명에서도 엿볼 수 있다. 장수왕은 평양으로 천도했다. _<고구려사에 보이는 ‘정변(政變)’과 역사적 의미> 중
따라서 어느 사회든 국왕의 계승관계란 기본적으로 수직적인 승계가 특정 시점에는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세대계승’의 가능성은 향후 자세한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적어도 고구려에서도 빈번한 형제계승의 사례만을 근거로 초기에 부자계승의 원칙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볼 필요까지는 없을 것이다. 즉 고구려에서는 초기부터 왕위계승은 부자계승이 기본적인 원칙이었으며, 형제간의 계승은 당대의 특수한 사정으로 인해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초기에 유독 형제계승이 빈번했던 별도의 사회적 배경을 가정하고 이를 추적하는 것이 고구려의 왕위계승에 대한 좀 더 안전한 접근 방식이 아닐까 싶다. 이러한 관점에서 고구려 초기 형제계승을 정당화하는 사례, 즉 아들이 있었는데도 형제간의 계승을 우선시했던 사례를 논의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런데 고구려본기에서 전하는 형제간의 계승은 민중왕의 사례만 제외하면 모두 사료 내에서는 납득할 만한 배경에 제시되고 있었다. 예컨대 산상왕 같은 경우 고국천왕이 자식이 없는 특수한 상황에서 즉위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_<고구려 차대왕의 정변과 초기 왕위계승의 원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