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의 말
“이 사자는 자신의 유전자를 더 널리 퍼트리려 하고 있습니다.”드넓은 초원이 펼쳐진 동물 다큐멘터리에 자주 등장하는 문구이다. 그렇지, 결국 생명체의 목적이라는 게 생존과 번식이지. 뇌 호르몬이 기분을 좌지우지하고, 본능(유전자)에 따라 누군가에게 끌리고, 일단은 수컷이니까 조금 더 과감해야 하고… 그런데, 그렇다면, 이 삶의 주어는 누구인가? “불멸의 유전자”의 보이지 않는 명령을 열심히 (이기적으로!) 따르기만 하면, 그것이 내 삶이 되는 건가. 메리 미즐리는 이런 상황에 유머스럽지만 단호하게 일침을 놓는다(기막힌 비유와 독설이 이분의 특기이다).
“경주마 이클립스의 왼쪽 무릎이 더비 경마에서 이겼다고 주장한다면, 만일 나의 작은창자가 내 점심을 소화했다고 말한다면 […] 루비콘강을 건넌 것은 카이사르의 뇌가 아니라 카이사르였다. 그리고 강을 건너기로 결정한 것 역시 카이사르의 시상하부-둘레계통 복합체나 대뇌겉질이 아니라 카이사르였다.”
그래, 우리 삶의 주어는 카이사르라고!
『이기적 유전자』 vs 『짐승과 인간』1976년,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가 출간되었다. 출간 당시 독창적인 아이디어에 진화생물학의 최신 이론을 접목해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이 책이 설명하는 진화생물학은 이제 많은 부분 구식이 되었다. 자연선택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유전자가 거의 모든 것을 결정하고, 생명체는 유전자를 후대에 전달하는 존재로 단순화한 나머지 적잖은 오독을 불러오고 있다. 그럼에도 국내에서 『이기적 유전자』는 여전히 진화생물학을 대표하는 책인 것이 현실이다. 최신 유전학에서는 도킨스의 주장을 반박하는 연구들이 많이 진행되었지만, 찾아보기도 어렵고 대중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런 의혹을 품고 있다. 이 책이 이토록 사랑받는 이유는 이런 처절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기적인’ 사람(유전자)이 살아남는다는 메시지를 주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1978년, 메리 미즐리의 『짐승과 인간』이 출간되었다. 동물과 인간의 닮은 점을 통해서 인간의 본성을 재고하는 이 책은 출간 당시 많은 주목과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진화생물학, 사회생물학이 뜨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주장은 (영장류에서 진화한) 인간의 영광에 찬물을 끼얹는 형국이었다. 진화된 유전자를 갖고 있는 인간과 동물이 어떻게 같단 말인가!
1979년, 마침내 리처드 도킨스와 메리 미즐리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다. 이른바 ‘유전자 저글링(gene juggling)’. 유전자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진화론, 인간 본성, 인간 행동에 대해 신랄한 논쟁이 벌어졌다. 떠오르는 신성 도킨스와 첫 저서로 남성 철학자 일변의 철학계를 뒤짚어 엎어버린 미즐리. 시대의 큰 조류가 도킨스를 밀고 있었지만 메리 미즐리가 호락호락 물러설 인물은 아니었다(평소 논쟁을 즐기심). 그는 인간이 유전자의 조종을 받는 유기체가 아닐뿐더러, 행동의 동기에 있어 동물과 다르지 않으며, 알 수 없는 것에 둘러싸인 것이 인간의 운명이고, 그 운명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더 인간적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있는 힘껏.
‘진짜 세계’에 대한 목마름을 느껴본 적이 있지 않은가?2024년 현재, 도킨스의 유전자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도킨스는 헤비 트위터리언). 백인은 흑인보다, 남자는 여자보다, 인간은 동물보다 우월하다는 믿음은 여전히 공고하다. 그리고 그 부끄러운 믿음을 정당화하기 위해 누군가는 유전자를 슬쩍 들먹인다. 내가 그런 게 아니라 유전자 때문에 그런 거야.
트루스니스(truthiness). 코미디언 스티븐 콜베어는 증거와는 무관하게 직관으로 파악하는 진실을 가리키기 위해 이 단어를 만들었다. 믿고 싶은 것이 진실이 되는 시대다. 그리고 그렇게 쉬운 진실이 유통되고 있다. 그렇지만 문득, 초겨울 저녁 기러기가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면서 하늘을 가르며 날아갈 때… ‘진짜 세계’에 대한 목마름을 느껴본 적이 있지 않은가? 그 진짜 세계에 대한 이야기가 『짐승과 인간』에 있다.
너는 흰 눈을 저장해둔 곳에 가본 일이 있으며, 우박 창고에 들어가본 일이 있느냐? […]
소나기가 타고 올 길을 누가 텄는지 […] 너는 아느냐?
사람이란 얼씬도 하지 않는 곳, 인종이란 있어본 적도 없는 광야에 비가 쏟아져
거친 들을 흠뻑 적시고 메말랐던 땅에 푸성귀가 돋아나게 하는 것이 누구냐? […]
네가 북두칠성에 굴레를 씌우고 오리온 성좌의 사슬을 풀어주기라도 한단 말이냐? […]
너는 낚시로 레비아단을 낚을 수 있느냐? […]
그가 … 너와 계약을 맺고 종신토록 너의 종이 될 듯싶으냐? […]
그는 … 쇠를 지푸라기인 양 부러뜨리고 청동을 썩은 나무인 양 비벼버린다. […]
깊은 물웅덩이를 솥처럼 끓게 하고 바닷물을 기름 가마처럼 부글거리게 하는구나.
번쩍 길을 내며 지나가는 저 모습, 흰 머리를 휘날리며 물귀신같이 지나간다.
지상의 그 누가 그와 겨루랴. 생겨날 때부터 도무지 두려움을 모르는구나.
모든 권력가가 그 앞에서 쩔쩔매니, 모든 거만한 것들의 왕이 여기에 있다.
(욥기 38, 40, 41장)
이것이 찰스 다윈이 물리적 우주를 바라보는 방식이며, 내가 틀린 게 아니라면 아리스토텔레스도 그렇게 바라본다. 이것이 우리 본성이 살아가도록 적응한 우주이다. 이 우주는 우리에게 이질적이고 하찮게 여겨지는, 우리가 분리되어야 하는 곳이 아니다. 이것이 내가 이해하는 인본주의가 담고 있는 메시지다. 인본주의가 신을 파괴한다는 뜻일 수만은 없다. 그 주요 임무는 인간을 이해하고 구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혼자서는 이해될 수도 구원받을 수도 없다.
_『짐승과 인간』 본문에서
[P. 13] 논쟁 당사자들 사이에서 다리를 놓으려 애쓰는 동안 양측 모두로부터 계속해서 화살이 날아든다면 굳이 그럴 가치가 있을까? 『짐승과 인간』(Beast and Man)이 처음 출간된 1978년 이후 내가 해온 일이 그랬다.
내 책이 세상을 바꿔놓지 못했음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편을 갈라 대립하며 논쟁을 벌이는 것은 인간의 매우 깊은 습성이며, 화해를 위한 노력이 잘 먹혀들지 않는다. 스티븐 제이 굴드는 반목의 골이 너무나 깊기 때문에 다리를 놓는다는 관념은 완전히 버리고 논쟁을 벌이는 양극단 중 해를 덜 끼칠 쪽을 지지함으로써 균형이나 잡으려 노력하는 편이 나을 것이라고 (체념한 듯) 말하기도 했다.
그의 말에는 일리가 있다. 그렇지만 반목이 더할 나위 없이 지독한 와중에도 일부 사람들은 실제로 문제가 해결되기를 바란다. 격렬한 논란이 한동안 이어져 양측이 터무니없이 극단적 입장으로 치닫고 나면 피로와 환멸이 찾아오는데, 이럴 때 이따금 화해 시도가 반가워지는 것이다. 이것이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인간 본성이라는 것이 있느냐 없느냐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을 때 일어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