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1. 삼국 지도 2. 삼국 계보도 3. 진수전陳壽傳 4. 배송지전裴松之傳 5. 삼국 군주 묘호廟號·시호諡號·연호年號 6. 삼국 역사 간략 연표 7. 『삼국지』 「배송지 주」 인용 일서逸書 해제 8. 『삼국지』의 지명 9. 삼국의 관직 10. 『삼국지』 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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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 삼국지 : 사전 : 배송지 주까지 완역한 결정판 이용현황 표 - 등록번호, 청구기호, 권별정보, 자료실, 이용여부로 구성 되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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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관 인문자연과학자료실(31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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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2.33 -26-5
서울관 인문자연과학자료실(314호)
이용불가
출판사 책소개
글항아리판 『정사 삼국지』(전8권)이 출간되었다. 이번 완역본의 의의는 국내 최초로 「배송지 주注」를 완역하고, 부록으로 『정사 삼국지 사전』을 덧붙여 완벽한 학술 번역을 추구했다는 데 있다. 번역본의 저본은 『흠정사고전서회요』 본 『삼국지』다. 이 판본은 역대 『삼국지 배송지주』 여러 판각본을 청나라 건륭 45년, 관에서 교감하고 건륭제의 열람을 위해 정식으로 출간하여 자금성 이조당에 소장한 선본이다. 이번 번역 작업의 관건은 ‘배송지 주’였다. 독서의 편의를 위해 진수의 『삼국지』를 번역한 부분과 배송지 주를 번역한 부분을 구분해서 본문에 같이 배치했다. 「배송지 주」가 들어가야 할 부분에는 “○” 부호를 붙이고 각 단락 아래에 역시 “○” 부호를 붙여 주注 전체 문장을 번역하여 수록했다. 배송지가 교감이나 비평을 위해 자신의 견해를 밝힌 대목은 별도의 단락으로 구별하고 전체 문장을 고딕체로 처리했다. 『삼국지』 원문의 각 권에는 열전의 주인공과 연관된 인물의 생애를 부기附記한 경우가 있다. 이 번역본에서는 부기한 인물의 성명을 “[ ]”로 묶어서 구별할 수 있게 했다. 또한 「위서」 「촉서」 「오서」를 모두 「위지」 「촉지」 「오지」로 표기했으며, 한자는 다르지만 우리말 발음이 같은 지명과 인명은 출현할 때마다 한자를 병기해 혼동을 피했다. 관직 명칭에는 대부분 별도로 각주를 달지 않고 이 번역본 마지막 권 『정사 삼국지 사전』에 삼국 관직의 종류와 품계를 대략 설명하여 종합적으로 알아볼 수 있게 했다. 중국의 삼국을 통일한 왕조는 사마씨의 진나라다. 그 진나라 저작랑을 지낸 진수가 정사 『삼국지』를 쓴 것이 280~290년 무렵이다. 이후 진수의 『삼국지』는 『사기』 『한서』 『동관한기』와 함께 ‘전4사’로 불리며 지식인의 필독서가 되었다. 그러나 진수의 『삼국지』는 필법이 지나치게 간결하고 근엄하여 삼국 역사의 진실한 면모와 다양한 자료를 빠뜨렸다는 지적을 받기 시작했다. 또 진수는 당시 진나라 관리였으므로 진나라에서 기피하는 관점이나 내용은 소홀하게 다루거나 아예 다루지 않았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 이에 진수가 『삼국지』를 쓰고 약 140년 정도 지나서 남조 송나라 문제가 중서시랑 배송지에게 삼국의 서로 다른 기록을 채집하여 진수의 『삼국지』에 상세한 주석을 달라고 명을 내렸다. 배송지는 어명을 받고 당시의 각종 기록을 종합하여 429년 무렵에 『삼국지』 원본에 맞먹는 분량의 방대한 주석을 완성했다. 이것이 유명한 『삼국지』 「배송지 주」다. 역대로 학자들은 배송지가 인용한 서적이 무려 230여 종에 이르고, 그중에는 지금 전해오지 않는 서적이 다수임을 입증했다. 또 최근에 연구자들은 치밀한 집계를 통해 『삼국지』 원문의 글자 수가 36만여 자, 「배송지 주」가 32만여 자에 달하는 것으로 밝혀냈다. 『수서』 「경적지」의 정사 항목에 이미 진수가 짓고, 배송지가 주를 단 『삼국지』 65권이 기록되어 있으므로, 이로써 「배송지 주」는 일찍부터 진수의 원문과 함께 읽혔음을 알 수 있다. 안타깝게도 지금 우리의 독서계에는 「배송지 주」를 빼고 진수의 『삼국지』 원문만 번역한 판본이 2종 나와 있다. 소설 『삼국지연의』 번역이 만연한 현실 상황에서 진수의 원문을 번역한 것만으로도 정사 『삼국지』의 가치를 인정한 훌륭한 업적임을 부인할 수 없지만, 「배송지 주」가 빠진 번역은 결국 정사 『삼국지』의 면모와 가치를 절반밖에 제공할 수 없는 한계를 지니게 된다. 「배송지 주」에 포함된 풍부한 사료의 내용과 가치를 아는 분들은 『삼국지』 원문만 옮긴 기존 번역에 짙은 아쉬움을 표시하며 하루빨리 「배송지 주」까지 포함한 정사 『삼국지』 완역본이 나오기를 학수고대한다고 언급하곤 했다.
이미 역대 학자들이 지적한 바와 같이 진수의 『삼국지』 원문은 간결하고 근엄한 필치와 춘추필법에 가까운 엄격한 사관을 선보였지만, 진수가 처한 정치·사회적 상황 탓에 당시 권력자의 눈치를 보느라 응당 기록해야 할 역사 사실을 빠뜨린 경우가 많았다. 진수는 진나라에서 벼슬했기에, 한→위→진으로 이어지는 계보를 정통으로 간주했고, 이 계보와 연관된 역사를 다룸에 있어서 위·진에 관한 긍정적인 사료를 많이 인용하고 부정적인 사료는 종종 도외시하곤 했다. 조조가 중풍에 걸린 척 쓰러져서 자신의 숙부를 속인 행동이라든지, 낮잠을 제때 깨우지 않았다고 자신의 애첩을 죽인 일 등, 그의 간교함과 포악함을 드러내는 내용은 진수의 원문에 기록되지 않았으므로 「배송지 주」를 통해서만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또 진수는 위나라 고귀향공 조모가 당시 실권자 사마소의 전횡에 맞서 일으킨 비장한 거병의 진상을 밝히지 않고 “5월 기축일己丑日(초7일) 고귀향공이 세상을 떠나니 향년 20세였다”라고만 기록한 후 태후의 입을 빌려 고귀향공이 대역무도한 패륜을 저질렀다고 언급했다. 고귀향공의 거병 진상도 「배송지 주」를 통해서만 알 수 있는데, 이 진상을 「배송지 주」에 기록하지 않았다면 고귀향공을 시해한 가충과 성제의 만행은 영원히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 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사례는 진수가 위·진 정통론을 고수하느라 일정 정도 역사의 진실에 눈감은 결과라고밖에 할 수 없다. 또 우리 고대사에 관한 기록인 「위지·동이전」에도 배송지가 여러 대목에 자세한 주를 달아서 진수 『삼국지』 원문의 누락 부분을 보충했다. 그중에서도 부여의 동명 전설은 우리에게 고구려의 동명성왕 주몽 신화가 그것에서 연원했음을 밝혀주고 있으며, 동옥저의 민며느리 풍속도 「배송지 주」에 처음 기록된 역사적 사실임을 알려주고 있다. 이 몇 가지 사례만 보더라도 『삼국지』 원문의 부족한 점을 「배송지 주」가 보완하고 있으므로, 「배송지 주」를 제외하면 당시 역사적 진실에 다가서기 어려움이 분명하다.
방대한 원문을 완역하고 『정사 삼국지 사전』 부록까지 엮어낸 것은 김영문 선생이다. 몇 년 전 그는 현전 ‘소설 삼국지’ 최초의 텍스트인 『삼국지평화』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와 다른 디테일을 확인하고 과연 정사 『삼국지』에는 그것이 본래 어떤 양상으로 기록되어 있는지 그 원전을 탐색하곤 했다. 본격적으로 『삼국지평화』와 『삼국지연의』, 『삼국지』 「배송지 주」의 내용을 비교하여 읽으면서는 중국 삼국 역사의 진상을 새롭게 인식하는 즐거움을 누렸다. 『삼국지평화』는 『삼국지연의』의 10분의 1에 불과하므로 완역 기간이 그렇게 길지 않았고, 오히려 그 작업 기간에 『삼국지』 「배송지 주」 읽기에 흠뻑 빠져 있었다. 애초에 완역에 착수할 마음은 전혀 없었다고 역자는 밝힌다. 진수의 『삼국지』 원문만 해도 36만여 자이고, 「배송지 주」도 32만여 자에 달하므로 70만 자에 가까운 한문 고문古文을 완역해내려면 거의 모든 일을 전폐하고 장기간 번역에만 매달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생계를 위해 다른 일을 하면서도 「배송지 주」 읽기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초등학교 때 『삼국지연의』를 처음 읽을 때와 비슷한 독서 홀릭 상태에 빠진 셈이었다. 물론 주관적인 느낌이지만 「배송지 주」는 그에게 ‘소설보다 재미있는 정사’로 인식되었고, 그 재미가 그의 마음을 통째로 사로잡았다. 그러던 2020년 어느 가을날 역자는 기어코 『삼국지』 원문과 「배송지 주」 전체를 완역해야겠다고 마음먹는다. “왜 그런 결심을 하게 되었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것이 그때 ‘투명한 햇살 아래 흩날리던 낙엽 때문’이라고 대답하겠다”라고 그는 말한다.
편집자의 말 5년 전 김영문 선생으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진수의 『정사 삼국지』를 완역하려고 하는데 글항아리에서 출판이 가능하겠느냐는 문의였다. 선생과는 이미 여러 권의 중국 인문학 서적으로 호흡을 맞추었고 『동주 열국지』도 펴냈다. 그 이후 『손자병법』 십일가주十一家注를 같이 작업하기로 돼 있었다. 나로서는 다소 의외의 제안이었다. 『정사 삼국지』는 이미 국내에 두어 종이 번역돼 있는지라 거기에 더 보태려면 이유가 분명해야 했다. 「배송지 주」도 같이 완역할 것이라는 말이 뒤따라 들렸다. 거기에 귀가 번쩍 뜨였다. 배송지라니! 『삼국지』만큼 방대한 배송지의 주석을 같이 번역한다면 확실한 차별화가 되고, 국내 『삼국지』 독서 수준을 몇 단계 끌어올릴 수 있다. 문제는 분량이다. 기존의 『정사 삼국지』는 위·촉·오에 각각 1권씩 총 3권으로 묶어내는 적당한 분량이지만, 여기에 배송지 주가 더해지면 「위지魏志」만 4권, 「촉지蜀志」 1권, 「오지吳志」 2권으로 최소 7권 구성이 된다. 거기다가 주요 인물 가계도, 관직명, 일서逸書 해제, 지도 등을 따로 묶은 『정사 삼국지 사전』까지 전 8권의 방대한 양이 된다. 여기까진 좋다. 살짝 고민이 되는 부분이 있었다. 한자 원문을 다 넣겠다는 게 역자의 생각이었다. 그렇게 되면 대략 1500쪽이 늘어난다. 안 그래도 덩치가 큰데 매머드급이 된다. 두꺼워서 양장본을 안 할 수 없고, 그렇게 내놓으면 가격이 비싸질 것은 분명했다. 20만 원이 넘어갈 텐데 이 금액을 감당할 독자가 얼마나 될 것인가. 고민은 길지 않았다. 내고 싶다는 답변을 드렸다. 사실 「배송지 주」는 중국학 전문 출판사로서 글항아리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다. 그 소망을 이뤄주겠다는데 무얼 망설이겠는가. 그로부터 1년여 후, 원고가 도착했다. 꼼꼼하게 번역하고 교감한 흔적이 역력했다. 배송지의 원문이 한글로 바뀌어 있는 걸 보니 감회가 남달랐다. 그가 인용하는 고서들은 대다수가 사라지고 없는 책들이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진지배주陳志裴注’라는 말이 있듯이, 조선시대까지 『삼국지』는 곧 배송지 주가 포함된 판본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둘은 떨어질 수 없는 짝꿍이었다. 그러던 것이 20세기 들어와 부박한 독서 문화 속에서 진지陳志는 배주裴注라는 친구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 인연을 되찾아 이어 붙인 것에 큰 보람을 느낀다. 연초 언론사의 출판면 특집에 『정사 삼국지』를 곧 내겠다고 호언장담을 했다. 그러고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2년의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분량이 분량인지라 감당하기가 버거웠다. 작업을 하다가 멈추길 여러 번이었다. 그리고 올해도 다 지나가는 12월이 되어서야 드디어 독자 분들께 선보이게 됐다. 책을 빨리 내라고 전화로 독려해주신 독자들과 완벽한 원고를 넘겨주시고도 묵묵히 기다려주고 협조해주신 김영문 선생님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꼼꼼하게 교정을 봐준 태서현 편집자에게도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 복잡한 본문 체제를 읽기 좋게 구현해준 디자이너들께도 감사하고, 주요 등장인물의 얼굴을 새로운 분위기로 그려준 박순철 화백께 특별한 감사를 드린다.
(강성민 글항아리 대표)
책속에서
이 부록은 『삼국지』 자체의 부족한 점을 보충하고, 이 번역본의 독자들에게 다양한 독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삼국지』는 기전체紀傳體 역사서임에도 「표表」와 「지志」가 없어서 당시 연표를 일목요연하게 파악하기 어렵고, 당시 지리와 문물제도도 명확하게 인지하기 어렵다. 이 때문에 이 부록의 「『삼국지』 해제」에도 밝힌 것처럼 청대의 학자들은 이를 보충하기 위해 다양한 작업을 진행했고, 많은 성과를 거뒀다. 하지만 이 업적들은 분야마다 그 분량이 방대하므로 이를 모두 번역하여 이 부록에 전부 실을 수 없다. 따라서 『삼국지』 자체의 부족한 점을 보충한다는 취지를 살리고, 이 번역본을 읽는 현대 독자들의 기호에 맞추고, 좀더 간편하고 내실 있게 이 번역본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다음 몇 가지 부문을 새롭게 편집하여 이 부록에 넣었다. - 머리말 중에서
배송지는 세상에서 사사롭게 개인 비석을 세우며 사실에 어긋나는 내용을 써넣자 표문을 올려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비석의 명문銘文을 제작하는 것은 후세에 교훈을 밝게 제시하기 위해서입니다. 스스로 특별한 공훈이나 뛰어난 덕망을 갖추지 못했다면 이런 의전儀典에 부응할 수 없습니다. (…) 비석을 세우려는 사람들은 모두 조정에 보고하게 하고 조정의 논의로 허락한 뒤에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십시오. 이렇게 하면 아마도 근거 없이 비석 세우는 일을 방지할 수 있고, 공적 사실이 있는 사람을 넉넉히 현창할 수 있어서 백대 이후의 사람들로 하여금 거짓이 아님을 알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그 대의는 사람들의 우러러봄에 신망을 주고, 그 도리는 미래의 지표에 믿음을 줄 수 있게 됩니다.” 이로부터 사사롭게 비석 세우는 일이 모두 금지되었다. - 4. 배송지전裴松之傳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