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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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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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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단 : 그날 계엄을 막지 못했더라면 : 정보라 소설 이용현황 표 - 등록번호, 청구기호, 권별정보, 자료실, 이용여부로 구성 되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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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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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계엄을 막지 못했더라면…
2024년 12월 3일을 가장 명징하게 담아낸
부커상, 전미도서상, 필립 K. 딕상 최종 후보 정보라 작가 신작 소설


《처단》은 2022 부커상, 2023 전미도서상, 2025 필립 K. 최종 후보에 이름을 올리며 한국문학의 창의적 장르성을 세계적으로 알린 정보라 작가가 12·3 비상계엄을 그려낸, 지금 이 순간 가장 시의적인 소설이다. 정보라 작가는 2024년 12월 3일 대한민국 제20대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한 시점 그리고 그 이전과 이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무엇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시민이 지켜내고 바로잡은 것은 무엇인지, 우리에게는 앞으로 무엇이 남아 있을지 《처단》을 통해 담담하고도 처연하게 보여준다. 비상계엄은 6시간만에 해제되었지만, 그 몇 시간에 멈추고 허물어진 누군가의 일상과 삶, 의미, 가치에 대해 복기한다. 섣부르게 희망적인 미래를 전망하기보다 미래가 없는 상황, 미래가 어떻게 될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상황에 놓인 사람들의 반응과 시선, 나아감을 조용히 보여준다.

해설: 혼령으로 일어서는 공동체

《처단》은 이런 문장으로 실행된다. "이것은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은 이야기이다."(9쪽)

얼핏 지당하게 수긍되는 명제와도 같은 이 문장은 SF라는 정보라의 문학적 영토와 '기록'이 배면에 품은 사적(私的), 사실적 성격이 충돌하며 한 편의 소설을 향해 나아가는 점화의 순간으로 작동한다. 이제 막 소설의 문밖으로 나온 독자는 이 문장에 동의하는 한편 그러기에는 너무도 익숙한 상황적 전개 때문에 기시감을 초과하는 현실성마저 느끼며 이야기의 문을 마저 닫지 못한 마음으로 서성대고 있진 않을까. 우리가 아는 현실에서 단지 한 발짝 더 뗐을 뿐인데 그 발밑은 천 길 낭떠러지라는 지독히 사실적인 그림. 정보라의 SF가 섬뜩한 이유는 단 한줄기의 서사만을 비틀었을 뿐이라는 점으로부터 육박해온다. 이렇게 말하는 게 허락된다면 이 소설은 '르포르타주-SF'다.

정보라는 스스로 극사실주의 작가라 말한다. 그의 말에 기댈 때 저 문장은 《처단》이 지극히 현실적인 SF라는 것, 승자 중심의 역사가 기록하지 않는(않을) 이야기라는 것과 함께 산 자의 이야기만으로 소급되지 않을 것임을 축약한다. 문학은 언제나 역사의 기록보다 기민한 움직임의 조건 속에서 현재를 수립하며 그러한 정본의 역사가 제출하지 않은 문장들을 뒤돌아보며 추스른다.

근자에 한국 사회는 '시민'이라는 단어가 함의하는 정치성을 과도하게 돌출시키며 흘러가는 중이다. 2000년대로만 한정한다더라도 그 기점을 어디로 잡을 것인가 더듬어보자면 연쇄적으로 달려 나오는 참사의 목록에, 우리의 정치적 삶이 어째서 이토록 부당한 방식으로 누군가의 목숨을 희생양 삼아 융기해야 했던가 말문이 막혀 머뭇대게 되지만 그러한 부정의의 방점이 2024년 12월 3일에 찍히는 데는 별 이견이 없을 것 같다.

《처단》은 그날을 배경으로 한다. 그리고 정보라의 현실에서 '2차 비상계엄'은 극악무도한 방식으로 자행된다. 이 소설의 서사가 긴박한 몰입감을 선사하는 이유가 지난한 현실의 더블(Double)이기 때문임은 우리의 트라우마로서 확인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소설은 피해자의 트라우마를 건드리지 않고 기록하는 '거짓말'로 SF를 유려하게 채택하며 동시에 현실을 향한 경고로 제출된다. 신념으로서 SF는 사회적 의미에 대한 재사유를 위한 것임을 상기할 때 이 이야기는 그런 일은 오직 소설 속에서만 일어나야 한다는 간곡한 소망으로 써 내려간 것처럼도 보인다. 그것은 결코 쉬 봉합되지 않을 우리 사회의 상흔을 염려하는 자의 주문을 닮았다. 이 서사는 현실에서 출발하고 현실을 초과한다.

수거 목록. 수거: 거두어 감. 용례: 쓰레기 수거. 굳이 표준국어대사전을 찾지 않아도 되는 상식일진대, 우리는 이 단어가 사람의 이름이나 특정 단체의 명칭과 붙을 수 있음을 누군가의 수첩을 통해 보았다. 그러나 국가의 사적 편취에 눈먼 자에 복종하기 위해 작성된 선무당의 수첩으로부터 꺼내 정보라에게 이식된 이름의 목록은 결을 달리한다. 거대 야당이나 힘을 가진 단체였던 그것은 차라리 불린 적 없는 이름들이다. 정보라는 허약하고 지친 이름들을 자신의 수첩에 각인한다.

노동조합원과 조합 상근자인 '그녀'와 '그녀의 아내'는 여러 광장과 행진에서 마주친 '데모 동지'다. 첫 문장을 지나자마자 마주한 것이 "그녀"와 함께 있는 그녀의 "아내"(9쪽)인 게다. 정공법으로 천연덕스럽게 돌진하는 문장에서 우리는 둘의 조합이 정상성 문법의 규율 사회로부터 배제되기에 십상인 최약체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한다. 〈지향〉의 그녀들을 연상시키는 이들이 반가울 새도 없이 병원이란 조건은 난공불락의 처지를 더욱 궁색하게 몬다. 병원에 있다는 신체적 허약성은 그들의 결합이 '그녀'를 '아내'의 '보호자'로 세울 수 없다는 사회적 허약성에 겹쳐 폐가 굳어가는 아내가 더 이상 일하지 못할 처지라는 자본의 허약성에 대한 예고에 이르기까지 켜켜이 죄어오는 것이다.

그녀는 아내의 보호자가 아니다. 그녀는 "아내의 '간병인'이었다. 의사에게는 친척이라고 말했다"(23쪽). 간병인은 통상 직업적으로 부여된 역할이지 관계를 드러내는 용어로 쓰이지 않는다. '보호자'야말로 '정상 가족'과 가족 간병을 당연시한 결과로 두루뭉술하게 송출된 단어인 것이다. 보호자라는 말이 등장하는 방식과 맥락에는 법률이 요청하는 법적 주체, 시민의 요건이 뭉근하게 배어있다.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정상성'에 미달, 미성숙한 자는 보호자가 필요하다는 건데, 게다가 병원에서 호출될 때는 서류의 책임과 치료비 정산 등 병원의 리스크 관리 차원으로 소급되는 개념으로 변용된다. 차별금지법제정연대가 개념화한 '운명을 기댈 권리'와는 너무도 동떨어진 호출인 게다. 그마저도 그녀는 아내가 수술실로 들어가버리자 병원 내에서 탈각된다. 간병인으로서 역할마저 정지되니 그녀가 머물 자리도 동시에 납작하게 접혀버린다. 그녀는 갈 데가 없다. (보호자의 사인 등) 자신을 기재할 지면도 기립할 공간도 없다는 것은 그녀의 사회적 표상이나 마찬가지다. 분명히 존재하지만 온전한 자신으로는 표류할 수밖에 없는 그녀의 불안에 정치적 혼란이 중첩된다.

애초 12월 3일이 세계 장애인의 날이었음을 그런 방식으로 알고 싶었던 이는 아무도 없다. 비상계엄은 단 하루(이 역시 표면적이지만) 장애인의 날마저 빼앗아 간 셈이다. 거기에 더해 '2차 비상계엄'은 계엄군과 함께 소설의 현실로 침투한다.

"장애인 콜택시는 계엄령과 함께 운행이 중단되었다. 일반 택시는 대부분 휠체어 사용자를 태우려 하지 않았다. 전동휠체어는 일반 택시에 들어가지 않았다. 장애인 활동가들은 저상버스를 기다려서 타거나 지하철을 이용해서 사무실로 이동했다."(65~66쪽)

르포르타주-SF의 문장은 버석거리는 현실의 냉랭함과 건조함을 그대로 옮긴다. 저 문장의 어디에 허구가 있을까. 지난한 현실 앞에 계엄이라는 폭압은 누군가의 취약성을 한 겹 더 발가벗길 따름이다. Vulnerability, 취약성으로 번역되는 이 단어는 상처받을 가능성을 향해 한껏 열려있다. 이들을 휠체어에서 강제로 내리고 던지는 행위는 비유적이 아니라 다리를 절단하는 일이기도 하다. 만약 갑자기 걸을 수 없게 된 자의 집에 불이 난다면 그 전과는 완전히 다른 공포를 체현할 거라는 식의 짐작만으로 닿기에는 턱없이 부족해서 그런 폭력은 더 깊은 죄가 된다.

쉽게 상처받을 수 있는 존재는 곳곳에 있다. 이주노동자의 이름은 원래 다른 것이었지만 "한국 사람들이 발음하기 어려워해"(40쪽) '알'로 삭제, 변형된다. 가뜩이나 학력, 직업, 나이, 장소나 차림새에 따라서도 달라지는 우리 사회 내 호명의 방식에는 계급과 계층, 자본과 세대의 문제가 지저분하게 착종 되어 모호하기만 한데, 이주노동자의 이름은 그 주인과 상관없이 호명 주체의 입말에 편하게 재단된다. 대학원에 진학하고 가정도 꾸리며 귀화를 마친 알의 한국어 실력은 유창하지만 여전히 제대로 된 이름을 되찾지는 못한다. 이름은 타자에 의한 부름인 것이다. 이름이 협소하게 재단되는 것이 알의 존재에 대한 유비이듯 학교 밖 성소수자 청소년 '단단'은 삭제되는 방식이 존재를 유지하기에 유리하다는 걸 깨우친 이다. 여러모로 '보호자'가 필요해 보이지만 그를 보호할 어른은 부재한다. 어째서 배제되는 것이 삶의 지속과 연동되어야 한단 말인가.

시민이면서도 내내 권리 앞에 누락된 자들, 그러나 여기서 알과 단단이 (영상) '기록'하는 자들이라는 것에 눈길이 머문다. 우리 사회 내에서 '입 없는 자'로 치부되는 이들에게 작가가 널리 말할 입을 주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알이 실천과 이론 사이의 연결을 고민하는 자라는 것, 단단이 광장의 응원봉과 깃발의 연대를 아는 자라는 것은 작가가 이들을 신뢰하는 근거인 동시에 그들의 자원이기도 하다.
극우 선동가의 정치 집회 현장에서 카드발급으로 후원금을 인출하는 사례나 음모론으로 핸드폰 통신망의 안전성을 내세우며 가입을 요구하는 이들에게 동지들과 집회는 수익모델 창출과 자본의 환산이라는 미국식 천민자본주의의 사실적 장면을 그릴 때조차 그들 역시 "억울한 사람"(100쪽) 없는 세상을 원했던, '배신'당한 자들임을 말함으로써 진영의 편을 가르거나 혐오의 정동을 생산하지 않으려는 작가의 펜 끝이 퍽 사려 깊다.

그런가 하면 간호사 '양'은 한 사람이라기보다는 의사, 간호조무사, 환경미화원 등 병원 내 손길들의 집합명사와 같은 인물로 설정되어 돌봄의 문제를 톺아보게 한다. 특히 그(들)의 고단하고 방대한 업무의 범위에서 쉽사리 놓칠 뻔했던 건 그가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아가씨'나 '저기요'나 '언니야'나 심지어 '어이'라고" 불리며 "별 얘기를 다"(93쪽) 듣는 자는 끝내 자신의 임무를 온전히 살아내는 인물이다. "군인이 총을 드는 것을 보는 순간 1208호 환자의 얼굴을 몸으로 감"(105쪽)싸는 양의 행동은, 마치 눈 속에서 살고자 썰매와 하인을 두고 떠나지만 어찌 된 일인지 돌고 돌아 다시 얼어 죽어가는 하인 니키타 앞에 선 톨스토이의 인물 브레후노프를 떠올리게 한다. 다시 선 니키타 앞에서 일말의 지체도 없이 자신의 허리띠를 풀고 외투의 섶을 벌려 온몸으로 그를 덮어 숨을 내어주는 이야기는 최후의 순간마저 환자에게 어깨를 내어주고 숨을 거둔 양 간호사에게 포개지며 엄숙하리만치 깨끗한 돌봄의 정수를 보게 하는 것이다. 그가 마지막으로 뱉은 말은 이런 것이었다. "저한테 기대세요"(118쪽).

"연대하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었고 어디서나 달려왔다."(58쪽)

이런 연대는 어떻게 가능할까? 아프게도 그 동력에는 정의와 사랑 외에 고통이라는 감각에 대한 공감이 크게 작용하는 것 같다. 고통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도 개인의 고독을 확인하게끔 하는 고유의 감각으로서만 체험된다. 그럴진대 어째서 우리에게 고통이 공통 감각(Common sense)으로서 감지, 인식되어야 한단 말인가. 삶이 고통의 바다라는 작가는 고통은 타인이 대신 겪어줄 수도 없고 정확한 용어로 설명되지도 않는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고통을 쓰려는 자다. 감히 헤아릴 수 없을 것이라는 저어함은 SF 속에서 고통을 공유하고 어루만짐으로써 문학적으로 흡수, 변용된다. 그런 방식은 정보라의 SF가 증언의 가능성을 향해 열리는 지점이기도 하다. 고통의 기록 불가라는 언어의 한계를 SF로 넘을 때 존재의 경계는 산술을 포기하며 불가능을 지우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전체 정치에 대한 공포는 내내 비가시적으로 잠복해있던 우리의 연결고리를 수면 위로 밀어 올리며 고통의 공동체를 발족시킨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가장 잔혹한 방식으로 공동체를 확인하는 것이다.

거기에 여태 고통받는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이나 서울 중심의 정책과 사유가 만드는 불균형한 정치·경제적 지형도 속에서 이중 소외되는 사람들과 같은 그의 목록은 일목요연한 카테고리화를 거부하고 뛰쳐나간 광장과 행진의 목록처럼 숱한 지류를 형성한다. "계엄 정권과 반역자들"은 잊었지만 "서울이 아닌 곳에도, 대도시가 아닌 지역에도 사람이 산다"(56쪽)는 문장에서 보듯 삶과 투쟁은 수도와 지방, 도심과 변두리, 오피스와 건설 현장, 농장 어디에도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그렇게 각자의 방식으로 싸우는 사람들이 있음을 작가는 혹여나 놓칠세라 촘촘히 들여놓는다. 그 목록들은 모두 동지들의 이름이다.
"아내가 수술실에서 나오는 때를 기다리던 순간으로 돌아갈 수 없다면 하다못해 이 순간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총을 쏘기 전, 바로 그때에 머무르고 싶다고 그녀는 진심으로 그리워했다."(112쪽)
조지 오웰의 주인공 윈스턴이 골동품 가게에서 산 크림색 노트를 경유해 더듬으려던 것은 과거, 혁명 전의 삶이었다. 수술실에 들어간 아내를 기다리며 끊임없이 병원을 배회하던 그 순간을 그리워하던 그녀는 시체 더미가 옥죄어오자 감옥 안에서 사람들과 떨었던 순간을 그리워한다. 극한의 고통 앞에서 융기한 것은 '함께'라는 단어였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우리에게 기도문처럼 당도한 이 문장은 기억하듯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감이다. 그것은 주어와 목적어를 치환해도 성립하는 웅숭깊은 질문이다. 소설의 결말이 왜 혼의 모습으로 열려야 했는지에 대한 답은 이 문장의 사유와 공명한다.

시민들은 극한의 공포 앞에서 단말마의 비명이거나 그마저도 소거 당한 채 죽임을 당한다. 제대로 되지 않은 절차 없고 맥락 없는 죽음이다. 한 사회가 자의적이고 견고한 구획을 짓고 부적당하다고 거부한 자들을 '처단'한다. 그러니 이들은 '부정된 자'들이다. 유령이 죽음이라는 부정을 뚫고 '돌아오는 자(re-venir)'라는 레비나스를 조금 변형한다면 혼령은 그 뜻에 더해 '거기 있는 자'이기도 하다. 토속적 원귀란 생의 일면을 부정당함으로써 죽음으로 건너가지 못하고 거기 있지 않나. 정보라는 이들에게 약자가 가장 거대해지는 방법, 공포를 무기로 들려주며 복수를 감행한다. 공포는 딱히 가시성을 요구하지 않으면서도 되레 그 비가시성, 혼몽의 상태를 연출함으로써 존재의 내재적 불안을 상기하고 그럼으로써 주체의 자유를 속박한다는 점에서 힘이 세다. 거기에 혼령은 가부장제 권력을 세습한 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대가 끊기는 일, 씨족의 절멸임을 잘 알고 있지 않나. 그것을 예감하게 하는 것만으로도 혼령의 복수는 피 한 방울 없이 완수할 가능성을 확보한다. 본디 공포란 뒤집힌 현재, 미완의 욕망이 배태한 양상적 존재이기에 숭고하기까지 한 그것은 초월이 아니라 환상을 경유해 세계를 전복하는 상상력, SF의 힘이 된다.
혼령은 어쩌면 이 모든 사태, 정치적 올바름을 초과하는 육체성에서조차 경계를 지워나가는 작업이라 말할 수 있겠다. 공포의 조성은 기실 오랜 민담과 전설이 가진 민족적 '정서'에 기대는 가장 선량한 방식일지도. 그러니까 한국의 혼령은 종교적 색채를 띤 악귀(Devil)와 달라서 사태의 결과를 따져 묻고 응징하는 것보다 더 깊은 정동에 기댄다. 그런 정동 아래서 자고로 죄지은 자들은 발 뻗고 잠들지 못한다. 이 역시 선한 마음에 대한 끈질긴 믿음의 자장 안에 있는 게 아닐까.

'Break the story(이야기를 깨뜨리다)!'라는 표현은 어떤 이야기를 맨 처음 하는 사람에게 부여된다. 리베카 솔닛은 기존의 것을 깨뜨리는 이야기는 주변부에 있다면서 거기에 더해 방금 일어난 이야기를 가져오라 말하는데, 저널리즘을 위시한 이 말은 그 자리에 《처단》을 놓을 때 아귀가 딱 들어맞는다. 방금 일어났고 그러나 아직 미결인 일에 대해 정보라는 날래게 쓴다. 그가 고통을 남의 것으로 여기지 않기 위해 택한 방식 역시 거기에 (함께) 있는 것 그리고 쓰는 것이니까.

《처단》은 위반 세력의 처단이라는 조항을 완전히 전복하여 가장 문학적으로 행사하는 정보라식 단죄다. 작가는 혼령이 그러하듯 '거기 있음'으로, '지켜보고' '쓰는' 자다. 이 책이 출간될 때는 전 대통령의 내란우두머리죄에 대한 1심 선고 이후겠지만 그것이 어떤 방식이든 이보다 더욱 지독한 처단은 되지 못할 것이다. 눈치 보지 않는 입들, 거기 있는 자들로 인해 우리의 현실은 결코 만만하게 부정의 쪽으로 흘러가지만은 않을 것임을 믿는다. 그런 믿음은 이 소설의 혼이 일어서는 그림, 폭압의 어깨에 올라타는 전개가 가리키는 것이 진짜 정치 주체의 기립과 억압 공동체의 연대라는 데서 발아한다. 눈을 부릅뜬 공동체에 죽은 자와 산 자가 따로 있을 리 없다. 역사와 국가를 법과 국민을 일하는 사람과 여린 이들을 편취하고 윽박지를 때 시민은 언제든 그들의 어깨에 올라탈 것이다. 그때, 죽은 자가 산 자와 과거가 현재와 손잡을 것이다. 우리가 혼을 다해, 온몸으로 일어서는 순간이다. 우리는 복수형으로 거기 함께 있는 자'들'이다.
이것은 정보라가 보내는 경고장이다. 그래서 이 잔혹한 이야기는 슬프게 희망차다.

_황유지 문학평론가


오로지 걷는 데만 집중한
삶이 있는 곳으로의 걸음


《처단》은 2024년 12월 3일 계엄을 그리고 있다. 대한민국 제20대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한 후 무장한 군 병력을 동원해 국회를 비롯한 헌법기관을 무력화했고, 이에 반발하는 시민을 공격하려고 시도했기 때문이다. 비상계엄은 6시간만에 해제되었지만, 그 몇 시간은 누군가의 일상과 삶, 의미, 가치, 시간이 멈추고 허물어지는 데 부족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시간을 작가 정보라가 치밀하게 담아낸 소설이 《처단》이다.

비상계엄은 정치적, 경제적 혼란을 초래했다는 단순한 사실로만 설명할 수 없는 결과를 남겼다. 누군가는 1979년 이후 45년 만에 선포된 비상계엄 앞에서 절망적인 과거로의 회귀를 경험했고, 어떤 이는 광주 민주화 운동을 깊이 있는 작품으로 담아낸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과 비상계엄이 같은 해에 일어난 일이라는 데 새로운 절망을 느꼈다. 원 달러 환율 급등과 코스피 하락 등 환율·주식·채권 금융시장에 불확실성이 크게 확대되며 누군가의 가계 경제는 위기를 맞이했다. 국제적으로 한미일 관계 및 글로벌 금융시장에 대한 우려가 커져 외교·투자 신뢰가 흔들리며 어떤 이의 소중한 일터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이런 상황은 사회적으로 약자와 소수층에 더 위험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처단》에 잘 드러난 것처럼 이 상황을 타개하고 풀어간 것도 소위 약하고 적은 수의 우리 주변 사람들, 바로 시민이었다. 그들이 만들어낸 연대가 6시간만에 계엄을 해제한 것처럼, 희망적이기만 한 미래 전망은 차지하고라도 어쩌면 비상계엄이 야기한 불안과 공포도 헤쳐갈 수 없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무심하고 끈기 있게 '오로지 삶이 있는 곳으로 걷는 데만 집중하는' 시민의 걸음이 암시한다.

책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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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9] 이것은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은 이야기이다.
[P. 20~21] 그녀는 집에서 가져온 간식을 아내와 나눠 먹었다. 행진이 다시 출발했다. 아내는 그녀와 함께 또다시 대열 끝에서 천천히 느긋하게 걸었다.
"그때 나 꼬시려고 네가 일부러 느리게 걷는 줄 알았지."
나중에 그녀가 말했다.
[P. 104] "이봐요! 이게 무슨 짓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