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루서 킹이 평생 품었던 질문 - 공격적인 동시에 온건한 ‘사회운동’은 가능한가? -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두 체제의 장점만을 결합한 ‘비전’은 가능한가?
우리가 익히 아는 평화주의자라는 아이콘 이면에는, 위와 같이 모순되어 보이는 가치들을 결합하기 위해 치열하게 고뇌한 ‘급진적 사상가’이자 ‘냉철한 전략가’로서의 마틴 루서 킹이 존재했다. 이 질문들은 인종차별과 빈곤, 전쟁이라는 거대한 악에 맞서 투쟁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킹은 미국의 침례교 목사이자 흑인 민권운동가로,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고 존경받는 흑인 지도자로 기억되고 있다. “저는 꿈을 꿉니다(I have a dream)” 연설을 비롯해, 백인을 향한 증오가 아니라 연대와 사랑을 주장하며 펼친 비폭력저항, 시민불복종이 잘 알려져 있다. 미국 내 흑인의 지위를 향상시키는 데 전 생애를 바쳐 1957년 민권법과 1964년 민권법, 1965년 선거권법 제정에 큰 힘을 보탰다. 스물여섯인 젊은 나이에 이미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을 이끌었고, SCLC(남부기독교지도자회의)를 이끌며 워싱턴, 버밍햄, 셀마 등에서의 행진을 주도했다. 이 책은 마틴 루서 킹이 맺은 수많은 관계망을 폭넓게 다루며 1950~1960년대 민권운동의 배경과 고름 가득한 미국 정치를 보여 주는 한편, 생애 곳곳에서 마주하게 된 그의 질문들과 내면세계를 함께 들여다보게 한다.
1. 킹의 유년 시절 짐크로법이라는 야만의 세계
이 전기는 20세기 초 미국 흑인이 일상적으로 겪어야 했던 차별과 억압의 역사, 즉 아버지 킹의 어린 시절에서 출발한다. 당시 노예제는 폐지되었지만, 1876년 제정된 짐크로법(인종차별법)에 따라 학교, 기차, 식당, 심지어 화장실과 묘지에서까지 흑백 분리가 강제되었다. 사적인 공간인 자기 집에서조차 흑인은 백인과 체커나 도미노 게임을 함께 할 수 없었고, 백인 경찰과 정부, KKK단은 린치라는 폭력적 수단으로 두려움을 조장했다. 이러한 일상적 차별과 폭력은 흑인들에게 물질적, 심리적 취약성을 강요했다. 킹의 아버지 역시 어린 시절 당한 폭력의 트라우마로 가정에서 강압적으로 돌변하며 자녀들에게 정서적 문제를 안겼다. 그럼에도 킹이 올곧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고통받는 흑인 역사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은 양쪽 할머니와 어머니, 흑인 기독교 사회의 헌신적인 보살핌 덕분이었다.
2. 킹의 지적 열정 소로에서 마르크스, 다윈에서 브라이트먼까지
1944년 모어하우스칼리지에 조기입학한 킹은 사회학을 전공하며 인종 정의를 향한 길을 모색했다. 그는 교수진을 통해 비판적 사고를 훈련받으며,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시민불복종』(1849)을 접했고, 해로운 체제를 거부하는 비폭력저항 이론을 흡수했다. 1948년 진학한 크로저신학교에서, 다윈의 진화론을 다루며 ‘근대적 사고’ ‘시대정신’을 읽는 눈(94쪽)을 키웠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루소, 홉스, 벤담, 밀, 니체 등(104쪽)의 사상을 섭렵한 그는, 자본주의로 인해 발생하는 빈부격차와 불공정에 대한 의구심을 날카롭게 다듬어 갔다. 나아가 1951년 보스턴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하여, 인간성은 곧 ‘자유와 책임’을 의미한다는 에드거 브라이트먼의 ‘인격주의’ 철학(116쪽)에도 깊은 영향을 받는다. 청년 시절 서재와 강의실에서 흡수한 소로를 비롯한 간디, 틸리히, 니부어, 마르크스 등의 사상은 훗날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을 시작으로 미국 전역을 뒤흔든 ‘거리의 혁명’과 ‘비폭력저항’을 완성하는 강력한 지적 무기가 되었다.
3. 킹의 분노 사형을 각오한 ‘거리의 혁명’
1954년 코레타와 결혼한 킹은 백인우월주의의 요새인 앨라배마주 몽고메리(노예 거래 중심지)의 덱스터애비뉴침례교회에 부임한다. “스물여섯 살인 이 남성은 자신이 맡을 역할로 사형에 처할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9쪽) 1955년 12월 로자 파크스[NAACP(전미유색인종지위향상협회) 간사] 체포 사건으로 촉발된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움직임 속에서, 킹은 흡인력 있는 연설로 흑인들의 분노를 결집했다. “우리가 틀렸다면, 미국헌법도 틀렸습니다. 우리가 틀렸다면, 정의는 거짓입니다. 그렇기에 여기 몽고메리에 있는 우리는 공의가 물처럼,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물처럼 흐를 때까지 노력하며 싸우기로 다짐합니다.”(186쪽) 보이콧은 무려 381일간 지속되었다. 킹은 과속이라는 억지 혐의로 난생처음 경찰에 체포되었고, 집에는 폭탄이 터졌다. 흑인이 권리를 찾는 것에 대한 “백인의 반발(white backlash)은 즉각적이고 사나웠다”.
4. 킹의 승부수 ‘감옥을 무기로’ 케네디를 움직이다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은 1957년 민권법 제정이라는 승리로 귀결되었지만, 미국의 뿌리 깊은 분리 정책과 일상의 폭력은 계속되었다. 암살 위협이 끊이지 않는 가운데 백인시민위원회는 “니그로인종을 총, 활과 화살, 새총, 칼로 말살해야 한다”(208쪽)라고 민권운동에 대항했다. 1957년 킹은 “미국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SCLC(남부기독교지도자회의)를 창립하고 전국적인 비폭력 시위를 주도한다. 그는 “이제 더 이상 폭력이냐 비폭력이냐를 선택할 여지가 없습니다. 비폭력 아니면 비존재밖에 없습니다”(270쪽)라며 확고한 전략을 세웠다. 1960년, 내슈빌 청년들의 ‘자리잡기 운동(sit-in movement)’에 동참하던 킹은 또다시 체포된다(294쪽). 이때 자신이 수감되면 곧바로 언론의 주목을 받는다는 사실을 간파한 킹은 전략적으로 보석과 음식을 모두 거부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정치인 존 F. 케네디가 개입하게 되고, 이는 “케네디, 구출에 나서다!”(300쪽)라는 대서특필과 함께, 킹의 투쟁이 전국적 이슈로 격상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5. 킹의 대전략 ‘고도의 미디어 전술’ 민권법, 선거권법 제정
1961년, SNCC(학생비폭력조정위원회)가 올버니에서 벌인 유권자 등록 시위는 마틴 루서 킹에게 뼈아픈 좌절인 동시에 반면교사가 되었다. 보편적인 차원의 두루뭉술한 저항이나 시 관료, 정치인 들과의 어설픈 타협은 독이 될 뿐이라는 뼈저린 교훈을 얻은 그는, 이후의 투쟁을 훨씬 더 치밀하고 폭발적으로 기획하기 시작했다. 1963년, 킹은 가장 적대적인 도시 버밍햄에서 시위를 기획했다. 상대는 악명 높은 공공안전 위원 “황소” 티오필러스 유진 코너. 흑인 공동체를 결집해 시의 경제적 권력구조를 타격하고 매체 보도를 활용해 전국 시민이 투쟁에 참여하도록 유도했다. 경찰견과 소방 호스를 앞세운 당국의 야만적 진압이 매체에 노출되자, 대대적인 반향이 일었다. 법원의 명령에도 시위를 벌인 킹은 독방에 갇혔고, 이는 훗날 널리 회자될 ‘동료 성직자에게 보내는 편지’의 계기가 된다. 차후 학생들과 어린아이들까지 행진에 동원한 이 시위는 미국 전역의 공분을 일으키며 케네디의 ‘포괄적 민권 법안’ 제안(386쪽)이라는 승리를 이끌어 냈다. 버밍햄 시위의 여세를 몰아 워싱턴에 결집한 25만 명 앞에서, 마틴 루서 킹은 세기의 연설을 남겼다(419쪽). “저는 꿈을 꿉니다. 흑인 어린이와 백인 어린이가 손잡는 꿈을. 저는 이 아침에도 꿈을 꿉니다. 피부색이 아니라 인격에 따라 판단받는 날이 오기를.” 2년 후, SCLC, SNCC, 지역 활동가들과 함께 1965년 앨라배마주 셀마에서 유권자 등록을 위한 행진을 주도한다. 경찰의 곤봉과 최루가스에 무참히 짓밟힌 참상이 생중계된 ‘피의 일요일’, 뜻밖에도 당국과의 합의를 통해 시위대를 물리는 고도의 전술을 발휘한 ‘돌아선 화요일’ 등 킹의 지휘 아래 결집한 시민들은 5만 명으로 불어났다. 분노를 무기 삼고 비폭력을 전략 삼아 주 의사당 앞까지 행진한 이 치밀한 혁명은, 마침내 존슨 대통령의 ‘선거권 법안’ 서명(556쪽)이라는 역사를 완성해 냈다.
6. 킹의 새로운 전선, 인권 전쟁, 빈곤에 맞서다
노벨평화상 수상 이후, 킹의 시야는 흑인 민권운동을 넘어 ‘보편적 인권’이라는 더 거대한 전선으로 확장되었다. 그는 굳건한 신념을 바탕으로 당시 미국인의 단 19퍼센트만이 반대하던 베트남전쟁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648쪽). FBI의 집요한 공산주의자 몰이와 협박에 이어, 민권운동이 위축될 것을 우려한 동료들의 거센 만류조차 그의 행보와 발언을 막지 못했다.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폭력을 유발하는 우리 정부에 대해 먼저 발언하지 않고서는, 빈민가에서 억압받는 이들의 폭력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더 이상 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소년들을 위해, 폭력 아래 떨고 있는 수많은 사람을 위해, 저는 침묵할 수 없습니다(650쪽).” 전쟁에 대한 그의 급진적 비판은 곧 빈곤과 경제적 불평등이라는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에 대한 날카로운 저항으로 이어졌다. 킹은 실질적인 경제적 권리 쟁취를 위해 모두에게 조건 없이 소득을 지급하는 ‘소외계층권리법(Bill of Rights for the Disadvantaged)’ 제정을 정부에 촉구했다(446쪽, 569쪽). 1966년 북부 시카고로 거처를 옮긴 그는 빈민들을 결집해 일자리를 요구하는 ‘브레드바스켓 작전(Operation Breadbasket)’을 개시했다(450쪽, 619쪽). 나아가 백악관과 의사당이 보이는 공유지에 판자촌을 세우고 거대한 시민불복종을 전개하려 했던 ‘빈자들의운동(Poor People’s Campaign)’은, 불평등한 체제의 심장부를 겨눈 혁명적 운동이었다(667쪽).
7. 강박, 불안, 스캔들 불완전한 인간, 위대한 역사가 되다
수많은 동료의 생생한 증언, 가족의 전사와 기밀 해제된 FBI 문서 등 자료 수만 건을 바탕으로 복원한 마틴 루서 킹의 초상은, 우상화된 영웅 뒤에 있던 ‘진짜 인간’을 독자들 앞에 내보인다. [동료(해리 벨라폰테, 존 루이스, C. T. 비비언, 제시 잭슨, 후아니타 애버내시, 앤드루 영, 해리스 워포드, 제임스 로슨), 가족 및 최측근(코레타, 랠프 애버내시, 도러시 코튼 등) 인터뷰] 평화의 아이콘이라는 거대한 이름표 뒤에서, 극심한 불면증과 탈진, 우울증에 시달렸고 완벽한 지도력에 대한 강박으로 목 뒤에 신경성 경련인 틱을 앓았다. 아내에게 의존하면서도 끊임없는 여성 편력으로 스스로를 자책했고, 유능한 여성 동료들에게 지도적 위치를 내어 주지 않는 한계를 지닌 모순적인 인물이었다. FBI 수장 존 에드거 후버는 그의 이러한 사생활적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민권운동을 무너뜨리려 했다. 킹이 가는 곳, 그와 연결된 모든 주요 인사의 전화기에는 도청기가 심겼고, 치졸한 공작과 맹렬한 협박이 그의 숨통을 조였다. 그러나 킹의 진짜 위대함은 그가 결점이 없는 무결점의 성인이었다는 데 있지 않다. 스스로의 나약함과 도덕적 결함에 괴로워하면서도, 날아드는 폭탄과 칼, 암살과 감옥의 공포를 뚫고 묵묵히 폭력의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가 비폭력운동의 소명을 지켰다는 데 있다. 결함 많고 고통받던 한 인간이 온갖 억압을 딛고 도달한 숭고한 이 길은, 압도적이고 묵직한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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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루서 킹 : 분노를 전략으로, 민권에서 인권으로 이용현황 표 - 등록번호, 청구기호, 권별정보, 자료실, 이용여부로 구성 되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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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관 사회과학자료실(20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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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000148762
323.092 -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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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책소개
• 오늘날까지 지속되는 사회적 악에 맞서라는 강렬한 촉구 ― 르론 A. 마틴, 스탠퍼드대학교 종교학과 교수 • 마틴 루서 킹 평전의 결정판 ― 뉴욕타임스 · 타임 · 워싱턴포스트 · 아마존 ‘올해 최고의 책’
역사는 그를 ‘평화주의자’로 기억하지만 미 정부는 ‘냉철한 전략가’로 두려워했다 꿈을 앞당긴 것은 희망이 아닌, ‘전략’이었다
최신 FBI 기밀문서, 인터뷰 수만 건으로 복원한 20세기 혁명적 인물의 심층 역사 ★ 2024 퓰리처상 수상(전기 부문) ★ 2023 버락 오바마가 가장 사랑한 책 ★ 뉴욕타임스 · 타임 · 워싱턴포스트 · 아마존 ‘올해 최고의 책’
마틴 루서 킹에 대한 철저한 고증과 인터뷰 등 새 자료 수만 건을 바탕으로 한, 결정판 평전이 아르테 필로스 시리즈 52번 도서로 출간되었다. 이야기의 거장이라 평가받는 조너선 아이그가 최근 공개된 FBI 문서와 사적인 편지, 미발표 구술 녹음본을 토대로 복원한 킹의 초상으로, 2024년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뉴욕타임스 · 타임 · 워싱턴포스트 · 아마존은 “올해 최고의 책”으로 선정했으며, 버락 오바마는 이 책이 묘사한 민권운동 지도자의 다면성과 고뇌를 탁월하게 평가하며, “가장 사랑하는 책”이라 추천했다.
역사가 기억하는 ‘평화주의자’, 미 정부가 두려워한 ‘냉철한 전략가’. 이 평전의 가장 큰 특징으로, 치밀하고 혁명적인 전략가로의 킹을 조명한다. 그는 소로, 다윈, 니체, 마르크스 등의 사상을 철학적 무기로 삼았으며, 정교한 전략으로 ‘분노’를 무기 삼아 사회를 뒤흔들었다. 당시 미 정부와 FBI 수장 J. 에드거 후버는 그를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흑인”으로 규정하고, 감청과 협박 등 집요한 감시와 공작을 펼쳤으며, 저자는 이를 “역사학자의 탐정적 사고, 시인의 서정적 정밀함”(루이스 V. 볼드윈)으로 스릴러영화를 방불케 하는 서사적 에너지로 세밀히 묘사한다.
우상화된 영웅의 이면, 번민하는 인간의 초상. 저자는 영웅의 초상 뒤에 숨겨진 한 인간의 내면에도 깊숙이 다가간다. 평생 동안 평화적 시위를 이끌었지만 정작 자신은 내면의 평화를 찾지 못해 자기 회의와 우울증에 시달렸던 나약한 인간의 결함을 숨김없이 드러낸다. 백인들의 테러와 경찰의 폭력에 짓눌리면서도,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연설에서 “공의가 물처럼,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물처럼 흐를 때까지”(186쪽) 싸워 나간 끈질기며 급진적인 운동가의 면모를 입체적으로 펼쳐 낸다.
킹의 시대는 흑인과 백인이 철저히 분리된 사회였다. 음수대, 화장실, 식당 등 공용 공간은 곧 백인 전용이었고, 이를 위반하면 가혹한 폭력이 뒤따랐다. 이에 킹은 몽고메리, 워싱턴, 버밍햄, 셀마, 멤피스의 거리에서 오래된 인종 분리의 악습을 끊어 내고자 사람들을 이끌었다. 그는 흑인의 정신을 일으켜 민권운동을 전개했고, 비폭력 사상으로 무장한 행진을 전국에 전파했다. 나아가 베트남전쟁에 반대하며 평화운동에 앞장섰고, 빈곤을 퇴치하기 위해 자본주의의 병폐를 비판하기도 했다.
폭력에 굴하지 않는 행동으로 가장 애도받는 순교자이자 위대한 인간의 반열에 오른 마틴 루서 킹. 그가 외친 인종적, 경제적, 사회적 정의는 과거의 역사가 아니라 현재에도 여전히 시급한 과제이다. 이 책은 스탠퍼드대학교 종교학 교수(킹연구교육원 소장) 르론 A. 마틴의 추천 평처럼 “우리 자신의 인간성을 직시케 하며, 오늘날까지 지속되는 사회적 악에 맞서 증언하라는 촉구”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묵직한 울림을 선사한다.
마틴 루서 킹이 평생 품었던 질문 - 공격적인 동시에 온건한 ‘사회운동’은 가능한가? -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두 체제의 장점만을 결합한 ‘비전’은 가능한가?
우리가 익히 아는 평화주의자라는 아이콘 이면에는, 위와 같이 모순되어 보이는 가치들을 결합하기 위해 치열하게 고뇌한 ‘급진적 사상가’이자 ‘냉철한 전략가’로서의 마틴 루서 킹이 존재했다. 이 질문들은 인종차별과 빈곤, 전쟁이라는 거대한 악에 맞서 투쟁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킹은 미국의 침례교 목사이자 흑인 민권운동가로,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고 존경받는 흑인 지도자로 기억되고 있다. “저는 꿈을 꿉니다(I have a dream)” 연설을 비롯해, 백인을 향한 증오가 아니라 연대와 사랑을 주장하며 펼친 비폭력저항, 시민불복종이 잘 알려져 있다. 미국 내 흑인의 지위를 향상시키는 데 전 생애를 바쳐 1957년 민권법과 1964년 민권법, 1965년 선거권법 제정에 큰 힘을 보탰다. 스물여섯인 젊은 나이에 이미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을 이끌었고, SCLC(남부기독교지도자회의)를 이끌며 워싱턴, 버밍햄, 셀마 등에서의 행진을 주도했다. 이 책은 마틴 루서 킹이 맺은 수많은 관계망을 폭넓게 다루며 1950~1960년대 민권운동의 배경과 고름 가득한 미국 정치를 보여 주는 한편, 생애 곳곳에서 마주하게 된 그의 질문들과 내면세계를 함께 들여다보게 한다.
1. 킹의 유년 시절 짐크로법이라는 야만의 세계
이 전기는 20세기 초 미국 흑인이 일상적으로 겪어야 했던 차별과 억압의 역사, 즉 아버지 킹의 어린 시절에서 출발한다. 당시 노예제는 폐지되었지만, 1876년 제정된 짐크로법(인종차별법)에 따라 학교, 기차, 식당, 심지어 화장실과 묘지에서까지 흑백 분리가 강제되었다. 사적인 공간인 자기 집에서조차 흑인은 백인과 체커나 도미노 게임을 함께 할 수 없었고, 백인 경찰과 정부, KKK단은 린치라는 폭력적 수단으로 두려움을 조장했다. 이러한 일상적 차별과 폭력은 흑인들에게 물질적, 심리적 취약성을 강요했다. 킹의 아버지 역시 어린 시절 당한 폭력의 트라우마로 가정에서 강압적으로 돌변하며 자녀들에게 정서적 문제를 안겼다. 그럼에도 킹이 올곧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고통받는 흑인 역사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은 양쪽 할머니와 어머니, 흑인 기독교 사회의 헌신적인 보살핌 덕분이었다.
2. 킹의 지적 열정 소로에서 마르크스, 다윈에서 브라이트먼까지
1944년 모어하우스칼리지에 조기입학한 킹은 사회학을 전공하며 인종 정의를 향한 길을 모색했다. 그는 교수진을 통해 비판적 사고를 훈련받으며,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시민불복종』(1849)을 접했고, 해로운 체제를 거부하는 비폭력저항 이론을 흡수했다. 1948년 진학한 크로저신학교에서, 다윈의 진화론을 다루며 ‘근대적 사고’ ‘시대정신’을 읽는 눈(94쪽)을 키웠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루소, 홉스, 벤담, 밀, 니체 등(104쪽)의 사상을 섭렵한 그는, 자본주의로 인해 발생하는 빈부격차와 불공정에 대한 의구심을 날카롭게 다듬어 갔다. 나아가 1951년 보스턴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하여, 인간성은 곧 ‘자유와 책임’을 의미한다는 에드거 브라이트먼의 ‘인격주의’ 철학(116쪽)에도 깊은 영향을 받는다. 청년 시절 서재와 강의실에서 흡수한 소로를 비롯한 간디, 틸리히, 니부어, 마르크스 등의 사상은 훗날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을 시작으로 미국 전역을 뒤흔든 ‘거리의 혁명’과 ‘비폭력저항’을 완성하는 강력한 지적 무기가 되었다.
3. 킹의 분노 사형을 각오한 ‘거리의 혁명’
1954년 코레타와 결혼한 킹은 백인우월주의의 요새인 앨라배마주 몽고메리(노예 거래 중심지)의 덱스터애비뉴침례교회에 부임한다. “스물여섯 살인 이 남성은 자신이 맡을 역할로 사형에 처할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9쪽) 1955년 12월 로자 파크스[NAACP(전미유색인종지위향상협회) 간사] 체포 사건으로 촉발된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움직임 속에서, 킹은 흡인력 있는 연설로 흑인들의 분노를 결집했다. “우리가 틀렸다면, 미국헌법도 틀렸습니다. 우리가 틀렸다면, 정의는 거짓입니다. 그렇기에 여기 몽고메리에 있는 우리는 공의가 물처럼,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물처럼 흐를 때까지 노력하며 싸우기로 다짐합니다.”(186쪽) 보이콧은 무려 381일간 지속되었다. 킹은 과속이라는 억지 혐의로 난생처음 경찰에 체포되었고, 집에는 폭탄이 터졌다. 흑인이 권리를 찾는 것에 대한 “백인의 반발(white backlash)은 즉각적이고 사나웠다”.
4. 킹의 승부수 ‘감옥을 무기로’ 케네디를 움직이다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은 1957년 민권법 제정이라는 승리로 귀결되었지만, 미국의 뿌리 깊은 분리 정책과 일상의 폭력은 계속되었다. 암살 위협이 끊이지 않는 가운데 백인시민위원회는 “니그로인종을 총, 활과 화살, 새총, 칼로 말살해야 한다”(208쪽)라고 민권운동에 대항했다. 1957년 킹은 “미국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SCLC(남부기독교지도자회의)를 창립하고 전국적인 비폭력 시위를 주도한다. 그는 “이제 더 이상 폭력이냐 비폭력이냐를 선택할 여지가 없습니다. 비폭력 아니면 비존재밖에 없습니다”(270쪽)라며 확고한 전략을 세웠다. 1960년, 내슈빌 청년들의 ‘자리잡기 운동(sit-in movement)’에 동참하던 킹은 또다시 체포된다(294쪽). 이때 자신이 수감되면 곧바로 언론의 주목을 받는다는 사실을 간파한 킹은 전략적으로 보석과 음식을 모두 거부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정치인 존 F. 케네디가 개입하게 되고, 이는 “케네디, 구출에 나서다!”(300쪽)라는 대서특필과 함께, 킹의 투쟁이 전국적 이슈로 격상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5. 킹의 대전략 ‘고도의 미디어 전술’ 민권법, 선거권법 제정
1961년, SNCC(학생비폭력조정위원회)가 올버니에서 벌인 유권자 등록 시위는 마틴 루서 킹에게 뼈아픈 좌절인 동시에 반면교사가 되었다. 보편적인 차원의 두루뭉술한 저항이나 시 관료, 정치인 들과의 어설픈 타협은 독이 될 뿐이라는 뼈저린 교훈을 얻은 그는, 이후의 투쟁을 훨씬 더 치밀하고 폭발적으로 기획하기 시작했다. 1963년, 킹은 가장 적대적인 도시 버밍햄에서 시위를 기획했다. 상대는 악명 높은 공공안전 위원 “황소” 티오필러스 유진 코너. 흑인 공동체를 결집해 시의 경제적 권력구조를 타격하고 매체 보도를 활용해 전국 시민이 투쟁에 참여하도록 유도했다. 경찰견과 소방 호스를 앞세운 당국의 야만적 진압이 매체에 노출되자, 대대적인 반향이 일었다. 법원의 명령에도 시위를 벌인 킹은 독방에 갇혔고, 이는 훗날 널리 회자될 ‘동료 성직자에게 보내는 편지’의 계기가 된다. 차후 학생들과 어린아이들까지 행진에 동원한 이 시위는 미국 전역의 공분을 일으키며 케네디의 ‘포괄적 민권 법안’ 제안(386쪽)이라는 승리를 이끌어 냈다. 버밍햄 시위의 여세를 몰아 워싱턴에 결집한 25만 명 앞에서, 마틴 루서 킹은 세기의 연설을 남겼다(419쪽). “저는 꿈을 꿉니다. 흑인 어린이와 백인 어린이가 손잡는 꿈을. 저는 이 아침에도 꿈을 꿉니다. 피부색이 아니라 인격에 따라 판단받는 날이 오기를.” 2년 후, SCLC, SNCC, 지역 활동가들과 함께 1965년 앨라배마주 셀마에서 유권자 등록을 위한 행진을 주도한다. 경찰의 곤봉과 최루가스에 무참히 짓밟힌 참상이 생중계된 ‘피의 일요일’, 뜻밖에도 당국과의 합의를 통해 시위대를 물리는 고도의 전술을 발휘한 ‘돌아선 화요일’ 등 킹의 지휘 아래 결집한 시민들은 5만 명으로 불어났다. 분노를 무기 삼고 비폭력을 전략 삼아 주 의사당 앞까지 행진한 이 치밀한 혁명은, 마침내 존슨 대통령의 ‘선거권 법안’ 서명(556쪽)이라는 역사를 완성해 냈다.
6. 킹의 새로운 전선, 인권 전쟁, 빈곤에 맞서다
노벨평화상 수상 이후, 킹의 시야는 흑인 민권운동을 넘어 ‘보편적 인권’이라는 더 거대한 전선으로 확장되었다. 그는 굳건한 신념을 바탕으로 당시 미국인의 단 19퍼센트만이 반대하던 베트남전쟁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648쪽). FBI의 집요한 공산주의자 몰이와 협박에 이어, 민권운동이 위축될 것을 우려한 동료들의 거센 만류조차 그의 행보와 발언을 막지 못했다.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폭력을 유발하는 우리 정부에 대해 먼저 발언하지 않고서는, 빈민가에서 억압받는 이들의 폭력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더 이상 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소년들을 위해, 폭력 아래 떨고 있는 수많은 사람을 위해, 저는 침묵할 수 없습니다(650쪽).” 전쟁에 대한 그의 급진적 비판은 곧 빈곤과 경제적 불평등이라는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에 대한 날카로운 저항으로 이어졌다. 킹은 실질적인 경제적 권리 쟁취를 위해 모두에게 조건 없이 소득을 지급하는 ‘소외계층권리법(Bill of Rights for the Disadvantaged)’ 제정을 정부에 촉구했다(446쪽, 569쪽). 1966년 북부 시카고로 거처를 옮긴 그는 빈민들을 결집해 일자리를 요구하는 ‘브레드바스켓 작전(Operation Breadbasket)’을 개시했다(450쪽, 619쪽). 나아가 백악관과 의사당이 보이는 공유지에 판자촌을 세우고 거대한 시민불복종을 전개하려 했던 ‘빈자들의운동(Poor People’s Campaign)’은, 불평등한 체제의 심장부를 겨눈 혁명적 운동이었다(667쪽).
7. 강박, 불안, 스캔들 불완전한 인간, 위대한 역사가 되다
수많은 동료의 생생한 증언, 가족의 전사와 기밀 해제된 FBI 문서 등 자료 수만 건을 바탕으로 복원한 마틴 루서 킹의 초상은, 우상화된 영웅 뒤에 있던 ‘진짜 인간’을 독자들 앞에 내보인다. [동료(해리 벨라폰테, 존 루이스, C. T. 비비언, 제시 잭슨, 후아니타 애버내시, 앤드루 영, 해리스 워포드, 제임스 로슨), 가족 및 최측근(코레타, 랠프 애버내시, 도러시 코튼 등) 인터뷰] 평화의 아이콘이라는 거대한 이름표 뒤에서, 극심한 불면증과 탈진, 우울증에 시달렸고 완벽한 지도력에 대한 강박으로 목 뒤에 신경성 경련인 틱을 앓았다. 아내에게 의존하면서도 끊임없는 여성 편력으로 스스로를 자책했고, 유능한 여성 동료들에게 지도적 위치를 내어 주지 않는 한계를 지닌 모순적인 인물이었다. FBI 수장 존 에드거 후버는 그의 이러한 사생활적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민권운동을 무너뜨리려 했다. 킹이 가는 곳, 그와 연결된 모든 주요 인사의 전화기에는 도청기가 심겼고, 치졸한 공작과 맹렬한 협박이 그의 숨통을 조였다. 그러나 킹의 진짜 위대함은 그가 결점이 없는 무결점의 성인이었다는 데 있지 않다. 스스로의 나약함과 도덕적 결함에 괴로워하면서도, 날아드는 폭탄과 칼, 암살과 감옥의 공포를 뚫고 묵묵히 폭력의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가 비폭력운동의 소명을 지켰다는 데 있다. 결함 많고 고통받던 한 인간이 온갖 억압을 딛고 도달한 숭고한 이 길은, 압도적이고 묵직한 여운을 남긴다.
책속에서
[P.10] 킹이 등장하기 전까지 독립선언문과 미국헌법에 담긴 약속은 공허했다.
[P. 12] 킹은 성자도 상징도 아닌 한 사람이었다. 손톱을 물어뜯고 텔레비전 퀴즈 쇼를 보며 소리를 질렀다. 자녀들 몰래 담배를 피웠다. 톱시라는 작고 하얀 개를 키웠다. 가슴에는 흉터가 하나 있었는데, 1958년에 대동맥 옆에 박혔던 상아색 손잡이가 달린 편지 칼을 제거한 수술 자국이었다. 그는 피부가 너무 민감해 면도기를 쓸 수 없었다. 밤잠을 설쳤지만 낮잠은 잘 잤다. 회의에 늘상 지각했다. 침례교 목사가 하는 농담이 더 잘 먹힌다는 사실을 안 후로 짓궂은 농담 실력이 늘었다. 그 당시에는 주위에서 기이하게 여길 정도로 아내 코레타에게 의존했다. 그러면서도 자꾸만 바람을 피웠고, 연방수사국(FBI)에서 자신의 가정과 평판을 망치려고 전화와 호텔 객실을 도청한다는 사실을 알고서도 멈추지 않았다. 친구들 사이에서 두 번째 아내로 통하던 한 여성과 오랫동안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P. 103] 킹은 운율과 리듬감이 있는 이 노설교자의 설교문을 동경해 공책에 비슷한 구절을 끄적여 두었다. 차분하고 냉철한 지성으로 설교하라는 백인 교수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긴 했지만 언젠가 자신의 설교를 들을 신도들을 잊지 않았고 복음이 사회 변화에 쓰일 수 있다는 사실도 잊지 않았다. 킹은 바버에게 소수집단이 성공할 기회를 잡으려면 비폭력적인 혁명을 일으켜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산술적으로 보면 알 수 있죠.” 말년에 킹은 흑인과 백인 청중 모두에게 영감을 주는 메시지, 인종 정의를 모두에게 꼭 필요한 일로 들리게 하는 메시지, 신학과 지리학의 경계를 넘나들며 폭력을 쓰지 않고 인종 격차를 없애려면 양쪽 모두 행동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능력으로 천재성을 드러낸다. 그는 애틀랜타에서 보낸 어린 시절과 부모와 조부모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통해 미국이 흑인 문화와 백인 문화의 산물, 서로 다른 집단의 충돌과 혼합의 산물임을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