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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어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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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독자들에게 13

1부 분노
1장 성난 아시아 여자애 20
2장 인종적 상상계 36
3장 어설픈 흉내 54
4장 잊힌 전쟁 68
5장 침묵 속에 남겨 둔 것들 88

2부 수치심
6장 부모를 대신해 106
7장 유리 천장 130
8장 이도 저도 아닌 148
9장 오리엔탈리즘 166
10장 엄마와 망태 할아범 176
11장 자격지심 192

3부 은혜
12장 흑과 백 사이에서 218
13장 그 손을 물어야 할지니 240
14장 친족 공동체 266
15장 우리 또한 288

감사의 말 305
옮긴이 후기 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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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의 손을 물어야 할지니 : 흑백의 세계를 살며 생각한 것들 이용현황 표 - 등록번호, 청구기호, 권별정보, 자료실, 이용여부로 구성 되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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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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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흑백의 세상에서 아시아계 여성이 인종적 계급 구조를 헤쳐 가며
마침내 자신의 자리를 찾기까지
◆  억압의 손을 물고뜯으며 스스로를 갱신해 온 자기변신의 이야기

★  권력과 특권에 대한 이해가 진화해 가는 과정에 대한 탁월한 기록   ★
★  ‘보이지 않는 존재’들이 권력 구조를 해체하는 방법에 대한 통찰들이 가득하다  ★


영어에는 ‘손을 물다’biting the hand라는 관용구가 있다. 그 뒤에는 보통 ‘너를 먹여 준’that feed you이라는 수식어가 뒤따른다. 억압자의 입장에선 ‘배은망덕’이지만 피억압자의 입장에선 ‘저항’의 의미를 지닌 이 말은 저자가 백인 중심 영문학계에서 인정받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시절 멘토였던 저메이카 킨케이드 교수가 그들의 저의를 배반하는 전략을 생각해 보라며 충고 삼아 건넨 말이기도 하다.
한국전쟁을 겪고 미국으로 건너간 노동계급 부모 밑에서 성장해 1992년 LA봉기 당시 질풍노도의 사춘기를 지나며 불타는 한인 상점들을 목격했던 저자는 그로부터 30여 년이 흐른 2020년 조지 플로이드 사건 이후 벌어진 저항운동의 한가운데서 인종주의가 자신의 삶에 남긴 상처를 되돌아보며 이 회고록을 완성해 냈다. 하버드에서 빅토리아시대 문학을 전공한 저자가 흑인 문학을 연구하고 유색인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가 되기까지, 엄한 어머니 밑에서 반항을 일삼던 ‘앵그리 리틀 아시안 걸’이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자신의 어머니를 이해하게 되기까지, 인종주의 사회에서 분투해 온 부모와 자신의 삶을 촘촘히 되짚으며 써내려간 이 책은 저자 자신을 포함한 우리 모두의 내면에 자리 잡은 인종주의에 대한 통렬한 고발장인 동시에, 고통스러운 기억들을 헤집어 그 속에 자리한 거대한 억압의 그림자를 물고뜯으며 스스로를 끊임없이 갱신해 온 치열한 자기 변신의 기록이다.

◆  인종주의가 한 인간과 사회에 남기는 상처와 해악에 대한 통렬한 고발장

학교를 ‘피난처’라 여기며 주말이면 월요일 아침이 되기만을 기다릴 만큼 모범생이었던 줄리아의 어린 시절은 백인 사회에 받아들여지기 위한 눈물겨운 노력들로 점철돼 있다. 한국어밖에 모르는 할아버지와 지내다 어린이집에 가게 된 줄리아가 적응을 못 하자 엄마는 집에서도 영어를 쓰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3개월 만에 줄리아는 한국어를 싸그리 잊고 “돌이킬 수 없이 미국애”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같은 반 백인 친구한테 그녀는 동요 속 “중국인, 일본인, 인디언 족장” 중 하나일 뿐이고, 그 속에서 줄리아는 자신이 “한국인”임을 설명하기 위해 그 사이에 “한국인”을 끼워 넣어 부르며 눈꼬리를 옆으로 찢어 보였다. 그녀는 이 순간을 자신이 난생처음 ‘이중의식’, 즉 백인의 시선으로 자기 자신을 바라보며 자아가 분열되는 감각을 느꼈던 순간이라 회고한다.
그렇게 아이는 점점 인종주의 사회에서 아시안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일종의 ‘연기’를 요구하는 일임을 깨달아 간다. 백인 선생님한테 인정받기 위해 김치도 수학도 “미친 한국 엄마”도 너무 싫다는 에세이를 써내며 자신이 “얼마나 독특한 아시아계 미국인인지” “가짜 혐오를 연기”하고, “너무 백인스러운” 친구와 “너무 아시안스러운” 친구들을 깎아내리며 자신을 “딱 적당한” 아시안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동화의 몸부림은 거의 실패로 끝이 난다. 베트남계 아역을 뽑는 오디션에서도, 프린스턴 대학 시절 F. 스콧 피츠제럴드가 회원이었던 유서 깊은 클럽에 들어가고자 치룬 “역겹고 수치스러운” 신고식에서도, 백인 세상에 받아들여지기 위해 인내한 굴욕들은 어김없이 수치심과 우울, 분노와 자기혐오로 돌아오고 말았기 때문이다.
한편 그럴수록 줄리아는 능력주의라는 환상에 매달린다. 교육을 통해, 초인적인 노력과 성취를 통해 그런 수치심을 떨쳐낼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엘리트 중의 엘리트가 되어 백인들에게만 주어지는 그 “눈부신 기회”를 움켜쥐고 말겠다는 각오로 줄리아는 프린스턴에서도 하루 일정을 꽉꽉 채워 가며 조별 토론 수업조차 빠지는 법 없는 지독한 모범생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주류 백인 사회에 진입하기 위한 경쟁은 끝이 없다. 일단 들어가고 나면, 이전보다 훨씬 더 폐쇄적이고 더 백인 중심적인 세계로 들어가게 해주는 관문들이 기다리고 있다. 프린스턴을 졸업하고 엄청난 연봉을 약속받고 들어간 경영 컨설팅 회사에서도, 장학금 혜택을 약속받고 들어간 하버드 대학원에서도, 문턱관리와 수치심 유발, 배제를 기제로 유색인들에게 주어지는 한정된 자리를 따내기 위한 경쟁은 점점 더 치열해지고, 줄리아의 불안과 우울, 신경쇠약도 깊어진다. “박사 학위를 가진 흑인을 뭐라고 부르게? 그냥 깜둥이지”라는 오래된 농담처럼, 그녀가 뭘 성취하든, 얼마나 높이 올라가든, 문제는 인종주의 사회에서 유색인 여성으로 살아가는 일 자체였기 때문이다.

◆  세대를 넘어 이어지는 인종주의 트라우마의 서사
/ 이민 2세대의 부모에 대한 치열한 해석 투쟁과 그럼에도 끊어지지 않는 사슬들


“부모는 우리에게 더 나은 삶을 선사하고, 우리는 살점을 얼마나 떼어 주어야 그 빚을 갚을 수 있을지 고민하며 남은 생을 보낸다.” 이민자 부모와 그 자식 사이의 암묵적인 계약을 완벽히 묘사하고 있는 비야센시오의 이 말은 줄리아 리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검은” 미군이 주던 사탕은 버렸지만 미국이 기회의 땅이라는 생각은 버리지 못하고 이민을 온 한국 남자는 추방당할 상황에서 소개받은 영주권을 가진 “노처녀”와 만난 지 3주 만에 결혼식을 올린다. 그 노처녀는 한국에서 독일로, 그리고 미국으로 온 간호사였다. 그녀는 간호사로 종일 근무를 하면서도 남편의 주류 판매점 일을 도왔고, 일 년 동안 강도를 세 번이나 당하자 과부가 될까 두려워 간호사를 관두고 새로 시작한 치킨집을 함께 한다. 부부는 크리스마스와 추수감사절을 빼곤 하루도 빠짐없이 일했고, 두 딸을 명문고, 명문대에 진학시키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줄리아에게 어머니는 “모든 억압의 결정체”이기도 했다. 어찌 보면 엄마는 불행한 결혼 생활에 갇힌 채 계산대에서 돈을 훔치는 직원들과 통옥수수를 얼굴에다 던져 대는 손님들, 총을 겨누는 강도들 사이에서 하루하루를 버텨 내며 엄청난 희생과 헌신을 한 것이었지만, 화가 나면 딸에게 쥬스병을 집어던졌고, 성적을 닦달했으며, 억지로 그 잘난 사립학교에 보내고, 자신의 모든 불행에 대한 보상을 자식에게서 찾고자 한 사람이었다.
줄리아는 이렇게 “엄마의 사랑이 가부장제와 백인 우월주의의 형태를 띠고 있었던 것”은, 자식이 백인들로부터 당하게 될 일이 훨씬 더 가혹할 것이기에 매를 들었던 키에스 레이먼의 어머니나, “전쟁에 대비”시키겠다는 생각에서 손찌검을 했던 베트남 난민 출신 오션 브엉의 어머니처럼, “자식이 살아남아야 할 세상이 그랬기 때문”임을 이해해 나간다. 그리고 과장되고 시답잖은 괴담 정도로 치부했던 엄마의 피해망상적 이야기들을 전쟁의 포화처럼 계속되는 일상적 인종차별, 가부장제, 경제적 불안정, 역사적 트라우마가 뒤섞여 만들어진 무엇으로 재해석해 나가기 시작한다.
이 같은 피해망상과 불안, 공포에 대한 치열한 재해석의 과정은 부모 세대의 파괴적인 유산, 끝없는 부채의식으로부터 절연하고자 한 과정이었지만, 그 유산은 쉽사리 청산되지 않는다.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줄리아는 어느덧 자신의 아이들에게도 어머니로부터 들었던 말들을 되풀이하며 “엄한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너희는 아시아인의 얼굴을 하고 있고, 세상은 너희를 이방인이자 열등한 존재로 볼 거야, 남들 절반만큼이라도 가려면 두 배로 열심히 노력하고 두 배로 뛰어나야 해”라고 말이다. 그리고 열 살 난 딸이 소아과 의사에게 자살충동을 고백하게 되는 상황을 마주한다. 그녀의 딸 역시 완벽하고 특별하지 못하다면 실패자에 불과하다는 줄리아의 내면화된 생각과 행동을 그대로 따라하고 있었던 것이다.

# 어떻게 내가 무심코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 아이들한테 백인 우월주의가 하는 짓을 해버린 걸까? 내 아이들이 내가 세뇌당했던 방식대로 세뇌당하는 일은 절대 용납하지 않겠다고 항상 맹세해 온 내가? 딸아이는 그저 내가 나 자신을 대하는 방식을 그대로 따라 하고 있었다. 나는 나 자신이 평범한 한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을 허락하지 못했다. 완벽하고 특별하지 못하다면 나는 실패자, 바보, 낙오자였다. 그런 걸 나는 ‘엄한 사랑’이라거나 자기 책임을 다하는 것으로 포장했지만, 실은 인간으로 대접받으려면 그래야 한다고 바깥세상이 내게 말하는 소리를 그저 내면화한 데 지나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나는 “나 자신을 상대로 한 백인 우월주의의 대행자”가 되어 버렸다.

◆  주인의 손을 물어야 할지니, 그리고 네 앞에 있는 인간에게 인간이 되어라

이처럼 세대를 거듭하며 이어지는 인종주의 트라우마의 서사는 어떻게 끊어낼 수 있을까? 저자는 그 해답을 자신이 등져야 할 억압들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며 찾아나간다. 이는 단순히 인종차별적 선입견을 버리는 것 이상의 일이다. 그것은 부모의 징벌적 사랑과 절연하기를, 그간 인종주의 사회에서 배워 온 것들을 철저히 거부하기를,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기를 요구한다. 부모로서 자식에게 세상을 헤쳐 나갈 도구를 쥐여 주는 것과 그 도구를 지속적인 억압의 무기로 바꾸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부모에게, 혹은 스승에게, 혹은 이 나라에 진) “빚을 갚아야 한다”는 생각이 실은 “학대를 참아 내라”는 뜻을 숨기고 있을 때, 그것은 단호히 거부해야 마땅하다. 그리고 자신의 딸에게, 학생들에게, 후세대에 이 말을 할 때 배교의 대상이 되는 손은 자신의 손이 될 수도 있다는 각오를 동반한다. 자신이 피해자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가해자 혹은 공모자일 수도 있다는 자각, 그리하여 자신의 손이 물리는 손이 될 수도 있다는 깨달음이 그것이다.
이 같은 깨달음은 유색인 동료와 학생들로부터 온 것이기도 하다. 후대가 자신이 겪었던 것과 같은 자기 비하와 자기혐오의 논리에 빠져들지 않도록, 줄리아는 수치심을 느꼈던 무례한 순간들보다 교감이 이루어지는 순간들에 더 집중하고, 백인 엘리트 중장년층을 대상으로 권력의 언어를 구사하기보다 자신과 같은 유색인 학생들에게 전해줄 수 있는 이야기를 생각해 낸다. 인종과 민족성이란 궁극적으로 백인 우월주의와 식민주의가 만들어 낸 개념일 뿐이라는 원주민 친구의 지적에도 실마리가 있다. 원주민들의 사고에 따르면 피를 나눈 공동체, 피부색이 같은 이들이라고 해서 반드시 친족kin인 것은 아니다.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이 체로키족 혈통을 주장했던 것처럼) 백인들의 식민주의 문화에선 유전자 검사 따위로 혈통을 증명하고 자신이 그렇다고 선언하면 그만이지만, 원주민들에게 친족은 나를 동류로 인정해 주고 뜻을 같이하는 공동체로, 친족이 되려면 무엇보다 그 구성원들의 인정이 선행돼야 한다.
저자는 ‘탈식민주의’나 ‘반인종주의’ 같은 거창한 말을 쓰기보다 엉망진창인 세상을 다음 세대에 물려주지 않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묻는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진정한 ‘친족’, 좋은 조상, 좋은 가족, 좋은 이웃,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는가? 줄리아 리의 수업을 듣던 유색인 학생이 제시한 대답은 명쾌하다.
“네 앞에 있는 인간에게 인간이 되어라.”
아무리 유명하고 엄청난 자본을 움직인다 한들(심지어 BTS나 손흥민이라 해도) 이 나라 밖을 벗어나 백인들의 세계에 들어서면 인종차별의 피해자가 될 수 있는 우리지만, 폭염경보 속 비닐하우스에서 쉼없이 일하는 이주노동자에게는 “더운 나라 출신들이라 쉬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하는 또 다른 우리에게 던지는 말이 아닐까.

책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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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9] 엄마가 우리는 한국인이라고 알려 주었을 때, 난 불안감이 섞인 묘한 조바심을 느꼈다. 나는 친구에게 간단명료한 답을 주고 싶었다. 맞아 난 중국인이야, 라든지 난 일본인이 아니야 같은 답 말이다. 나보고 어떻게 반 친구한테 “한국인”이 뭔지 설명하란 말인가? 엄마는 한국이 “반도”고 어쩌고 하는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았는데, 내 머릿속에는 친구가 물어본 건 그런 게 아니란 말이야. 걔한테 내가 반도라고 말할 순 없잖아, 하는 생각뿐이었다. 답답해진 나는 백인의 관점에서 내 자신을 납득시키기 위해 웃픈 방법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다. 한글학교에서 친구들과 나는 위의 동요를 개사해 “중국인”과 “일본인” 사이에 “한국인”을 끼워 넣고 눈꼬리를 옆으로 찢어 보였다. 미국 문화에서 우리가 인식되도록 만들기 위해 자신의 생김새를 왜곡하고 있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했다. 뒤틀린 모습이라 해도 그저 눈에 띄고 싶었던 것이다.
[P. 64] 나는 이렇게 “너무 백인스러운” 친구와 “너무 아시아인스러운/폽스러운” 친구들에게 유난히 분노를 품었다. 그건 사실 내 안에서 타오르는 자기혐오였다. 그들의 모습에서 내가 싫어한 부분은 결국 나 자신의 모습에서 내가 제일 싫어한 부분과 같았다. 백인성에 지나치게 잘 동화된 모습이거나, 아니면 아시아인다움에서 충분히 벗어나지 못한 모습 말이다. 그들의 결점이라고 여겨지는 부분에 집중하고 있으면 나 자신의 문제는 직면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스스로에게, 적어도 쟤네만큼 화이트워싱되진 않았잖아, 혹은 적어도 쟤네만큼 폽스럽진 않잖아, 하고 말하며 자위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내가 스스로에게 부여한 자리 역시 내가 다른 아시아계들에게 부여한 자리와 마찬가지로 백인 우월주의 문화에 의해 왜곡된 것이었다. 나는 백인성의 틀 안에서 정의된 “딱 적당함”이라는 범주에 날 끼워 맞추고 있었다. 심지어 거기서도 나는 분노와 자기혐오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P. 76] 부모님은 전쟁의 기억을 말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물려주셨다. 비닐봉지를 모아 두는 습관으로, 낭비를 극히 꺼리는 태도로, 권위에 대한 두려움과 막연한 피해망상 같은 걸로 말이다. 언제든 도망칠 준비를 해라. 모든 걸 잃을 각오를 해라. 아무도 믿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