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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구기호: 306.9-23-1

- 서명: 각자도사 사회 : 존엄한 죽음을 가로막는 불평등한 삶의 조건을 성찰하다

- 편/저자: 송병기

- 발행처: 어크로스출판그룹(2023-02)

서평
 좋은 죽음 이전에 죽음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것은 가능할까
서평자
 최은경,경북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발행사항
 639 ( 2023-08-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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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1부 각자 알아서 살고, 각자 알아서 죽는 사회
1 집 - 집은 좋은 죽음을 보장하는 장소인가
2 노인 돌봄 - 노인은 국가의 짐인가
3 커뮤니티 케어 - 누구나 말하지만 아무도 모르는 정책
4 호스피스 - 왜 호스피스는 ‘임종 처리’ 기관이 되었나
5 콧줄 - 콧줄 단 채 생의 마지막을 맞아야 하는가
6 말기 의료결정 - 누구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할까
7 안락사 - 왜 어떤 사람들은 스스로 죽음을 앞당기고 싶어 할까
2부 보편적이고 존엄한 죽음을 상상하다
8 제사 - 죽은 이를 기억하는 방법이 이것밖에 없을까
9 무연고자 - 갈 데 없는 삶과 법으로 처리되는 죽음
10 현충원 - 그곳에 ‘보통 사람들’은 없다
11 코로나19 - 국민의 생명을 지킨다는 말은 무엇일까
12 웰다잉 - ‘잘 죽기 위해 잘 살아야 한다’는 말이 감추는 것들
13 냉동 인간 - 초인간적인 미래, 비인간적인 현실
14 영화관 - 함께 죽음을 보면서 삶을 실감하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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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죽으면 ‘좋은 죽음(혹은 자연사)’이고, 시설에서 죽으면 ‘나쁜 죽음(혹은 객사)’이라는 이분법을 넘어서야 한다. 존엄한 죽음은 집 그 자체가 아니라 공적 세계에 울려 퍼지는 ‘집 안의 목소리들’에 달려 있다.” - 27쪽 의료인류학자인 송병기는 오랫동안 의료 현장에서 죽음을 둘러싼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왔다. 그의 관심은 그간 의학과 윤리학에서 담아내지 못한 죽음의 ‘현장’ 이야기를 인류학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특별함이 있다. 인류학적 시선을 통해 하나의 가치와 기준을 고수하기 쉬운 의학과 윤리학이 놓칠 수 있는 죽음을 둘러싼 각자의 시선들이 엇갈리는 교차점을 잘 담아낸다. 책의 부제는 ‘존엄한 죽음을 가로막는 불평등한 삶의 조건을 성찰하다’라고 붙여져 있다. 겉으로 보기에 한국 사회에서 죽음을 둘러싼 법 제도의 언어 어디에도 명시적으로 불평등한 구절은 없어 보인다. 의료인 중 누구도 이 사람이 가난하기 때문에 더 치료받기 어렵다고 얘기하지 않으며, 국내법 조항에서 죽음을 재촉시키는 구절도 없다. 그러나 한국 사회의 죽음이 ‘불평등한 삶의 조건’을 반영한다면, 그것은 어떤 이들이 특별히 빈곤하게 죽어가는 데에 있지 않다. 그것은 ‘존엄한’ 죽음의 실현을 가로막을 수 있는 수많은 삶의 조건들을 누락시키고 있는 데에서 온다. 책에서 적고 있듯 의료 현장을 겪은 사람이라면 누구도 한국 사회에서 존엄한 죽음이 가능하다고 믿지 않는다. 질병과 노년은 곧잘 요양병원으로, 다시 요양원으로 치료와 수발을 위해 수없이 연쇄적으로 이동하고 옮겨진다. 요양보호라는 값싼 노동력을 통해 최소한의 생물학적 요구를 맞추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는다. 그 과정에서 죽음으로 가는 현장은 다만 시설 밖의 삶을 유예하는 현장이 된다. 죽어가는 사람의 의학적, 사회적, 실존적 요구를 살피는 것 역시 현장의 개개인이 알아서 감당해야 한다. 그 조건은 철저히 각 개인이 처해 있는 ‘자원’이라는 인적 물적 네트워크에 기대고 있기에 생물학적 죽음이 아닌 소위 ‘인간적인 죽음’은 더욱 불가능해진다. 저자는 ‘자기 결정권’과 ‘존엄사’ 등의 윤리적 서사 속에서 도리어 묻히고 방기되는 죽음의 목소리와 시선을 살핀다. 다양한 당사자들을 만나며 ‘커뮤니티 케어’나 ‘환자를 보는 병원’이라는 표면 속에 감추어진 각자의 소외와 고립, 단절이 어디서 비롯되는지 확인한다. 많이들 얘기하는 ‘좋은 죽음’이란 단어 속에서 오히려 서로가 좋은 죽음을 이행할 것으로 믿지 않는 불신의 골과 불협화음이 드러난다. 의사는 환자들이 좋은 죽음을 위해 준비할 것이라고 믿지 않고 가족이 환자의 죽음의 여정을 방해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환자와 가족들은 의사들이 좋은 죽음으로 안내할 것으로 믿지 않는다. 서로 불신하는 가운데 죽음이 최소한의 합의로 이루어지는 한, 증상을 처리하고 통제하는 속에서 죽음은 이행된다. 흔히들 아플 때 덜 아프고 잠자듯 조용히 죽는 것이 ‘좋은 죽음’이라고 얘기한다(82쪽). 그 속에서 저자가 발견하는 것은 노화와 노쇠, 죽음에 대한 거대한 터부와 혐오이다(86쪽). 병원은 죽음에 적합한 장소가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오랫동안 한국에서 사람들은 죽음을 병원에서 맞이하였다. 그러한 죽음은 다 괴롭고 아픈 기억이기만 할까. 고령화가 더욱 심해질 앞으로도 죽음이 시설 밖에서 이루어질 가능성은 요원하다. 시설 밖 죽음이 불가능하거나 어렵다는 것이 아니다. 이분법적으로 어떠한 삶이 불가능하거나 부적합하다는 얘기만큼 어떠한 죽음이 부적합하고 불가능하다는 얘기는 그 속에 담긴 조건들을 놓칠 수 있다. 11장에서 저자는 코로나로 인한 죽음과 중대재해로 인한 죽음을 비교하면서 왜 어떤 죽음은 기억되고, 어떤 죽음은 그렇지 않은가를 묻는다. 마찬가지로 좋은 죽음을 얘기하는 선에서 그에 미치지 못하는 죽음은 나쁜 죽음이 되고 기억되어서는 안 될 죽음으로 터부시되는 것은 아닌지 우려할 수밖에 없다. 죽음을 둘러싼 규범을 세심하게 질문하는 저자의 작업은 우리가 삶의 조건에 대해 살피도록 인도한다. 그것을 통해 발견하는 것은 죽음에 대한 질문을 통해 삶의 조건이 기억되고 연결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