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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구기호: 321.8-23-6

- 서명: 민주주의에 반대한다 : 무능한 민주주의를 향한 도전적 비판

- 편/저자: 제이슨 브레넌

- 발행처: 아라크네()

서평
 민주화 이후 맞이한 정치적 퇴행에 대한 공감
서평자
 강문구,경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
발행사항
 662 ( 2024-01-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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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호빗과 훌리건
제2장 무지하고, 비합리적이며, 잘못된 정보를 가진 민족주의자
제3장 정치 참여는 타락시킨다
제4장 정치는 당신이나 나에게 힘을 주지 않는다
제5장 정치는 시가 아니다
제6장 유능한 정부에 대한 권리
제7장 민주주의는 유능한가?
제8장 지식인의 통치
제9장 시민의 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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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편향적으로 집단을 형성하고, 그 집단과 자신을 강하게 동일시한다. 우리는 근거도 없이 다른 집단에 대한 적대감을 키우는 경향이 있다. 우리 편은 훌륭하고 정의로우며, 상대편은 나쁘고 멍청하고 부당하다고 가정한다. 우리 편의 죄는 대체로 용서하는 반면, 상대편에 관해서는 사소한 실수만 용서한다. 우리 편을 향한 헌신은 진실이나 도덕에 대한 헌신을 능가할 수 있다.” - 93쪽 2023년 윤석열 정부의 ‘미숙함’과 거대 야당의 ‘후안무치’ 행태를 동시에 맞닥뜨리고 있는 심사는 편치 않다. 이러한 민주주의를 갖기 위해 그간 우리는 그 험난한 군부 독재를 타도하려 했던가? 오늘의 한국 정치 현실이 우리가 갈망해 왔던 민주주의의 열매란 말인가? 한국 민주화 이후의 퇴행적인 정치행태는 우리를 너무나 허탈하게 만든다. 최근 두 가지 현상이 필자의 눈에 인상 깊게 들어온다. 먼저 영화 ‘서울의 봄’에 관한 것이다. 특히 젊은 세대들의 관심이 돋보인다. 우리의 최근 현대사의 한고비인 전두환 세력들의 군부 반란에 대한 적나라한 사실들이 우리를 놀라게 하고 또 좌절시킨다. ‘한 줌’의 ‘하나회 세력’이 좌지우지할 정도로 한국이라는 국가가 그렇게 허약하고 무기력했던가? 그러나 우리는 7년 후 다시 민주화를 이루게 되었다. 하지만 민주주의의 현실은? 다른 한 가지는 한때 차기 대선주자로까지 언급되던 안희정의 몰락에 관한 것이다. 그의 비서였던 문상철은 안희정의 몰락을 둘러싼 한국 정치의 구조적인 문제에 제대로 천착하지 않으면 또 다른 안희정이 탄생한다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우상의 탄생을 촉진하고 피해자를 공격한 수많은 정치인이 안희정이 사라진 이후 이미 새로운 숙주를 찾아 자리를 잡았다고 진단한다. 한국 민주화 이후 정치 현실에 대해 비관적인 상황에서 제이슨 브레넌의 책, 무능한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이라는 부제가 붙은 『민주주의에 반대한다』를 흥미롭게(?) 읽었다. 물론 한국 민주주의의 숱한 문제들을 모두 정리해 주지는 못하겠지만, 최소한 다시 그 문제들과 마주할 수 있는 근거는 제공해 줄 것 같았다. 브레넌은 정치 참여에 대한 낙관론에 대한 비판으로 논의를 시작한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정치 참여가 시민을 고귀하게 만들기보다는 타락시킨다는 것이다. 정치 참여가 “사람들을 더 똑똑하게 하고, 공동선에 더 관심을 기울이게 하고, 더 나은 교육을 받게 하고, 더 고귀하게 만들 것으로 기대한” 존 스튜어트 밀과는 반대로, 브레넌은 “대부분의 정치 참여는 우리를 교육하거나 고귀하게 만드는 데 실패할 뿐만 아니라 모욕하고 타락시키는 경향이 있다”고 강변한다(38쪽). 일반 시민들은 정치에 참여하게 되면 정신적 수행 능력이 낮은 수준으로 떨어지고, 관심 있는 분야에서는 ‘원시인’처럼 된다는 슘페터의 주장에 동조한다. 브레넌은 민주시민을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하는데, 곧 정치에 무관심하고 무식한 호빗, 강경하고 대체로 확고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정치의 광적인 팬인 훌리건,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치를 과학적이고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벌컨이 그것이다. 여기서 다시 한번 앞의 밀과 슘페터를 소환하면서, 밀은 정치 참여가 시민들을 계몽할 것이라는 전제하에, 정치적 숙의와 대의 정부 참여를 통해 호빗을 벌컨으로 변화시키기를 희망했다. 반면에 슘페터는 정치 참여가 사람을 망쳐놓을 것이기에, 현실은 호빗을 훌리건으로 변화시키는 경향이 높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브레넌은 민주적 계몽주의나 민주적 승리주의에 모두 반대하고 있다. (어쩌면 이러한 현상 분석이 현재 한국에서 목격하는 민주주의의 퇴행과 타락을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줄지도 모른다는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참여가 높을수록 무지와 맹신과 배타적 공격성이 높아지는….) 브레넌은 민주적인 유권자들의 역량을 불신하면서, ‘철인 정치’를 주장한 플라톤을 인식론자(epistocrat)라고 명명한다. 그는 지식인에 의한 통치를 의미하는 에피스토크라시를 작금의 문제 많은 민주주의의 대안으로 강력하게 제시한다. 이후의 브레넌의 논의는 민주주의와 에피스토크라시의 비교평가이며, 그는 후자 에피스토크라시의 비교적 장점을 일관되게 제시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정치체제는 역량, 기술, 그리고 그 기술에 따라 행동하는 선의에 의해 공식적으로 분배되는 정치권력의 정도만큼 에피스토크라시적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정치 참여가 잘못된 ‘정치적 부족주의’를 통해 우리를 진짜 적대적 관계에 놓이게 하고 집단적 증오심을 부추긴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진단은 현재 한국의 ‘태극기 부대’와 ‘개딸들’의 행태에 절망하고 있는 우리에게도 충분히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따라서 그나마 대안은 시민사회의 범위를 넓히고 정치의 영역을 축소시키는데 도움이 될 ‘에피스토크라시’와 연관하여 사유하는 것이라는 브레넌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