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는 의술을 주술과 종교의 영역에서 과학의 영역으로 옮겨놓은 인물이며, 그의 이름은 여전히 의학계 안과 바깥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는 상징자본으로 남아있다. 본 논문에서는 이 같은 의사로서의 선구적 발자취와 아우라에 가려져 있었던 히포크라테스의 이념적 편향성을 짚어보려고 한다. 히포크라테스가 쓴 것으로 추정되는 『공기, 물, 장소』의 저자는 기후, 수질, 지형, 토양 등의 자연환경이 그 지역 토착민들의 체질과 기질뿐 아니라 사회문화적 풍토와 정치체제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환경결정론은 유럽과 아시아의 차이를 우열과 위계로 치환하는 유럽중심주의 이분법의 ‘과학적’ 토대를 제공하여 동시대 그리스 사회의 제반 인문학 분야에 적잖은 반향을 울렸으며, 유럽의 식민지팽창이 본격화된 르네상스와 계몽주의 시대부터 서구 문화의 위대함과 제국주의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데 끊임없이 동원되었다. 히포크라테스가 작성하고 그의 후예들이 계승한 인식론적 지형도에는 항상 한쪽에 척박한 환경을 무릅쓰고 강인한 정신력으로 위대한 문명을 일궈낸 유럽 백인이 있고, 그 반대쪽에 천혜의 환경에 취하여 나약하고 나태하게 살아가는 비유럽 ‘유색인’이 있다. 세계만민의 의사로 추앙받는 히포크라테스가 제국주의와 오리엔탈리즘의 원형적 설계자였다는 것은 서구 지성사가 남긴 또 하나의 씁쓸한 아이러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