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양희 시인이 한국대표명시선100의 하나로 자신의 대표시 50편을 가려 묶었다. 고통과 상처의 삶을 지나 일상에서 인식과 성찰의 우물을 길어 올리며 하나하나 눌러 쓴 시들이 모여 시인의 아픈 내부를 환하게 밝히고 있다. 시인은 그 힘으로 자신을 고양시키고 독자들의 아픈 가슴과 한량없이 만난다. 그녀에게 ‘쓴다는 것이 사는 것’이라면 그녀를 읽는 것은 우리도 어느 한 순간을 문득 사는 것일 수도 있다.
책속에서
1 단추를 채우면서 직소포에 들다 마음의 수수밭 . . . 2 진실로 좋다 불멸의 명작 바다시인의 고백 . . . 3 새에 대한 생각 나의 처소 그자는 시인이다. . . . 4 그믐달 터미널 간다 그 사람의 손을 보면 . . . 5 마음의 달 물결무늬고둥 뒤편 . . .
?마음의 수수밭
마음이 또 수수밭을 지난다. 머위 잎 몇 장 더 얹어 뒤란 으로 간다. 저녁만큼 저문 것이 여기 또 있다. 개밥바라기별이 내 눈보다 먼저 땅을 들여다본다 세상을 내려놓고는 길 한쪽도 볼 수 없다 논둑길 너머 길 끝에는 보리밭이 있고 보릿고개를 넘은 세월이 있다 바람은 자꾸 등짝을 때리고, 절골의 그림자는 암처럼 깊다. 나는 몇 번 머리를 흔들고 산 속의 산, 산 위의 산을 본다. 산은 올려다보아야 한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저기 저 하늘의 자리는 싱싱하게 푸르다. 푸른 것들이 어깨를 툭 친다. 올라가라고 그래야 한다고. 나를 부추기는 솔바람 속에서 내 막막함도 올라간다. 번쩍 제정신이 든다 정신이 들 때마다 우짖는 내 속의 목탁새들 나를 깨운다. 이 세상에 없는 길을 만들 수가 없다. 산 옆구리를 끼고 절벽을 오르니, 천불산千佛山이 몸속에 들어와 앉는다. 내 맘속 수수밭이 환해진다.
어제
내가 좋아하는 여울을 나보다 더 좋아하는 왜가리에게 넘겨주고 내가 좋아하는 바람을 나보다 더 좋아하는 바람새에게 넘겨주고
나는 무엇인가 놓고 온 것이 있는 것만 같아 자꾸 손바닥을 들여다본다.
너가 좋아하는 노을을 너보다 더 좋아하는 구름에게 넘겨주고 너가 좋아하는 들판을 너보다 더 좋아하는 바람에게 넘겨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