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도」 역시 사임당의 붓끝에서 나온 작품임을 확언하기는 어렵다. 다만 사임당의 그림으로 전해지는 여타 작품들에 비해 나름대로의 전거를 갖추고 있기에, 사임당의 작품에 가장 근접해 있는 그림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후대에 윤색되지 않은, 사임당 본연의 장점을 실체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또한 옛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고, 기억하고 싶어 했던 사임당의 모습을 가늠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그림의 가치는 충분하다.
현재 5만 원권 지폐에 실린 신사임당의 초상 옆에 도안으로 들어간 포도 그림이 이 작품을 모본으로 한 것이다. 그녀의 작품이 들어가야 했다면, 이 「포도」외에 마땅한 대안은 없었을 것이다. 학술적인 안목으로 냉정하게 평가한다면 주저되는 바가 없지는 않지만, 이 대목에서는 조금 너그러워지고 싶다. 이 그림마저 아니라면 신사임당의 그림은 더욱 자취를 찾기 어려워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지금으로서는 3백 년 전 문인들의 말에 기대어 보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1. 신사임당 - 포도」
하늘에서 인재를 낼 때에는 재능과 시련을 동시에 준다고 한다. 위대한 업적을 이루어 낸 위인이나 대예술가들의 삶을 돌아보면 자연스럽게 이 말에 수긍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 작품을 그린 탄은 이정도 그런 인물 중 하나이다.
탄은은 세종대왕의 고손자로 윤택하고 문예를 애호하는 집안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고, 타고난 재능을 바탕으로 30대부터 묵죽화의 대가로 명성을 얻었다.그야말로 남부러울 것 없는 순탄한 삶이었다. 하지만 서른아홉 살이 되던 해인 1592년, 하늘이 준비해 둔 시련을 맞는다. 바로 임진왜란이었다. 이때 탄은은 왜적의 칼에 맞아 팔이 거의 잘려 나가는 고초를 겪었다. 목숨을 잃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지만,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못하게 될지도 모르는 치명적인 부상이었다.
그러나 그는 생사를 넘나드는 위기를 강인한 의지로 극복하고, 이전보다 더욱 빼어난 경지를 향해 나아간다. 먹물 들인 비단에 금니라는 최상의 재료로 대나무, 매화, 난 20폭을 그리고, 자작시 17수를 곁들여 성첩한 《삼청첩(三淸帖)》이 그 증좌이다. 팔을 다친 지 2년도 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탄은이 전란으로 뿔뿔이 흩어졌던 옛 친구들을 만나 《삼청첩》을 보여 주니,간이 최립은 감격에 겨워 이렇게 찬탄했다.
전란 겪고 삼 년 만에 이렇게 모이니 / 그래도 화첩 한 권 증표로 남겨 두셨구려.
부러질 뻔한 그대의 팔뚝 조물주가 보호해 준 덕에 / 남은 생애 나의 눈동자도 흐리지 않게 되었소.
「2. 이정 - 고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