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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Ⅰ. 장만
1. 장만의 가계와 선조
2. 장만의 가족, 그리고 친·인척
3. 장만의 인맥

Ⅱ. 전쟁의 시작(선조시대)
4. 장만의 발탁-봉산군수, 명군을 휘어잡다
5. 임진왜란의 전후복구-조총부대 창설, 민생경제와 수군 재건

Ⅲ. 전쟁의 가운데(광해시대)
6. 함경도관찰사와 호지 지도-정탐전의 필요성
7. 평안도병마절도사, 중진제 추진과 4군 땅 회복
8. 심하전투와 장만의 대비
9. 광해군의 중립외교정책과 전략가 장만
10. 광해군의 양두정치와 장만

Ⅳ. 다시 전쟁, 또 전쟁(인조시대)
11. 인조반정의 성공과 팔도도원수 장만의 출정식
12. 이괄의 반란을 평정하다
13. 정묘호란 전야, 장만의 안주성 방략
14. 아! 남이흥, 안주성의 치열한 전투
15. 유배지에서 읊은 시조 '풍파에 놀란 사공 …'

Ⅴ. 장만의 죽음과 그 이후
16. 북두칠성이 지고, 장성이 무너지다
17. 사위 최명길, 그리고 병자호란
18. <낙서집> 간행과 장만에 대한 영·정조의 평가

충정공 장만 연보 5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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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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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란에 빠진 조선을 일으켜 세운 시대의 영웅 장만(張晩)

장만이 살았던 16~17세기 조선에는 수차례의 전란이 있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심하전투, 이괄의 난·인조반정, 정묘호란 그리고 장만 사후 일어났으나 그의 후배들이 감당했던 병자호란까지 7회의 전란이 그것이다. 이 전란의 시기에 장만은 거의 40년 가까운 기간 동안 중앙관료 혹은 지방관으로 근무하면서 백성들과 애환을 함께 하고, 병사들과 고락을 같이 했다.
장만은 문무겸전의 전략가로서 많은 업적을 남겼고 이 점을 기려 역대 왕들은 그에게 특별한 대우를 해주었다. 왕의 칭찬이 높으면 백성들로부터는 외면받기 십상이지만, 장만은 백성들로부터도 칭송을 들었다. 이괄의 난 때 관군과 반군의 전투를 성벽에서 구경한 백성들이 ‘장만은 볼만이요, 이괄은 꽹괄이로세!’라는 노래를 지어 부를 정도였다.
장만은 이른바 ‘조선의 전쟁시대’를 건너면서 민생과 국방에 기여를 한 인물이다. 큰 공로와 확고한 철학, 그리고 남과 다른 특별한 재능을 가졌던 인물이지만 그의 공로나 철학은 물론 장만이란 이름조차 생소하다는 사람이 적지 않다.
이 책은 당쟁과 무관하게, 국방 분야에서 능력을 발휘한 장만의 공로와 경세철학을 알아보려는 취지에서 씌어졌다. 조선조의 역사적 인물들이 당쟁으로 싸우기만 하고, 성리학 연구에만 골몰하여 실제 국방 일선에서 활약한 인물은 없다는 우리의 안이한 인식에 작은 경종이라도 울렸으면 하는 바람으로 만들어진 책이다.

실용국방 중립외교 전략으로 조선을 구해낸 장만 장군을 아십니까?

장만의 행적과 철학을 통해 그의 인격이 어느 정도 나타나기도 하지만, 오늘날과 당시를 비교했을 때 현저하게 드러나는 그의 위대성은 대략 서너 가지 쯤으로 정리가 된다. 우선 그의 전략가적 자질의 위대성이다. 일찍이 사신으로 북경에 갔다 오던 길에 누르하치 후금군의 군기를 보고 그들의 굴기(崛起)를 예상한 바 있다. 함경도관찰사 시절부터 정탐전을 시도했던 그는 정탐을 통해 얻은 데이터를 바탕으로, 명나라와 후금 간의 힘의 추이를 파악하여 절묘한 중립정책을 건의, 실행시켰다. 중립정책은 상대방에 대한 힘의 강약을 헤아리지 않고서는 섣불리 시행할 수가 없다. 데이터의 중요성은 오늘날에도 강조되지만 장만은 이미 그 시절 데이터의 중요성을 간파하여 적지의 지도를 세밀하게 만들어 적을 막는데 활용했고 왕에게 바쳤다. 아울러 을지문덕 이래 중시되던 안주성에 주목하여 안주성 방략을 누차 개진하고 있다. 이런 자강(自强)의 바탕위에 명과 후금 사이의 힘의 추세를 관찰하여 상대방을 기미(羈縻)하자는 것이 장만의 주장이었다. 명나라나 후금의 눈치만 볼 것이 아니라 자강을 먼저 하자는 것이다. 이런 인식 때문에 장만의 상소문에는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라는 주장이 끊이지 않고 나온다. 왜냐하면 ‘무릇 용병을 하고자 하는 자는 먼저 백성을 길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만의 이런 원칙적이면서도 유연한 주장은 화이론(華夷論)에 빠진 주자학도나 정권안보를 일차적 가치로 여기던 반정공신 등에 의해 번번이 무산되고 만다. 여기에 왕들의 무능도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었다.
다음은 성공한 쿠데타(이괄의 난)를 뒤집고도 권력을 찬탈하지 않고 표표히 낙향한 자세 이다. 역사에 간신으로 이름을 올린 많은 이들이나 후세의 여느 군인들 같았으면 어땠을까? 이괄의 난으로 왕은 도주했고, 이괄도 부하의 손에 죽어 변란은 평정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장만은 도성에 진주한 토벌군 사령관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헌 임금을 갈아치우고 새 임금을 세워 권력을 오로지 하거나, 아니면 스스로 임금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정충신, 남이흥 등 유수의 맹장과 수많은 병력이 자신의 수하에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흰옷을 입고 임금을 맞았다. 그리고는 시골로 낙향하여 인조의 추고를 받기까지 했다. 권력을 가졌으되 권력에 초연한 이런 자세야말로 그의 위대함이 아닐까?
그 다음은 혼군 또는 폭군이란 이름으로 쫓겨난 광해군을 향해 열아홉 번씩이나 올린 질책의 상소이다. 오늘에 비추어 본다면 아무리 강단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서너 번쯤은 윗 사람에게 질책의 말을 할 수 있겠지만 열아홉 번씩이나 올린 것은 대단한 끈질김이 아닌가? 절대군주 시절에 그런 질책을 받고도 장만을 죽이지 않은 광해군도 대단하지만 장만 또한 대단한 사람이다. 심지어 장만은 광해군의 진노로 파직당한 다음, 그러니까 인조반정이 일어나기 직적인 1623년 1월에도 다시 질책의 소차를 올리고 있다. 이 마지막 소차에서 장만은 자신이 목격한 관리들의 부정부패와 민생의 처참함을 호소하고, ‘이익은 간교한 자의 손으로 들어가고 원망은 구중궁궐의 임금에게 돌아가는 것을 마음 아파하면서 백성은 오직 나라의 근본임’을 또다시 환기시키고 있다. 그러고 보면 십 수차례에 이르는 장만의 상소도 결국은 민본주의자로서의 철학 때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장만은 이른바 ‘조선의 전쟁시대’를 건너면서 민생과 국방에 기여를 한 인물이다. 조선 전쟁사를 쓰면서 가장 중요한 전쟁들을 이끈 최고의 전략가 장만을 빼고 논할 수는 없는 일이다. 큰 공로와 확고한 철학, 그리고 남들과 다른 특별한 재능을 가졌던 인물이지만 그의 공로나 철학은 물론 장만이란 이름조차 생소하다는 사람이 적지 않다. 후세의 한 연구자는 그 까닭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즉 ‘조선시대 인물 및 정치사 연구가 학문적 계보 중심이나 당쟁사 중심으로 흘러 성리학 연구에 치중하거나 당인(黨人)으로 활동한 인물에 비중을 둔 나머지, 실제 국방 일선에서 활약한 장만 같은 인물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때문’(신병주, ‘文武兼全의 인물 張晩, 그 시대와 활동’)이란 것이다.

이 책 『문무겸전의 전략가 장만』에서 장만 장군의 일생과 그의 사위 최명길에게 이어진 실용국방과 중립외교의 전략을 읽는다.

책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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