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사건의 재구성 1장 고종독살설 재검토 _윤소영(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장 2·8독립선언의 전략성과 영향 _오노 야스테루(규슈대학 대학원 인문과학연구원) 3장 1919년 3월 1일 만세시위의 재구성 _김정인(춘천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4장 학생단 독립운동과 3월 5일 시위 _장규식(중앙대학교 역사학과) 5장 3·1운동의 탄압과 학살, 그리고 제노사이드 _김강산(성균관대학교 사학과) 6장 3·1운동의 마지막 만세시위 검토 _최우석(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부 만세시위의 목격자들 7장 청년 양주흡, 혁명을 꿈꾸다 _최우석(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8장 유학자 김황의 3·1운동 경험과 독립운동 이해 _서동일(국가보훈처) 9장 윤치호, 방관과 친일 사이 _노상균(연세대학교 사학과) 10장 조선군사령관 우쓰노미야 다로의 눈에 비친 3·1운동 _이민성(건국대학교 사학과) 11장 외국인 선교사가 바라본 3·1운동 _김승태(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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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년. 2, 사건과 목격자들 이용현황 표 - 등록번호, 청구기호, 권별정보, 자료실, 이용여부로 구성 되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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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책소개
3ㆍ1운동 100주년 새로운 역사학의 길을 찾다
1. 역사적 전환의 시대, ‘3ㆍ1운동’의 역사를 새로 쓰다
3·1운동은 거리의 저항 축제였다. 전국 방방곡곡 공원과 장터를 메운 사람들은 대로와 골목을 누비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로부터 100년이 흐른 지금 우리는 촛불을 밝혀 민주주의 진전을 이뤄냈고, 평화의 길을 여는 새로운 역사를 마주하고 있다. 역사학 또한 전환의 시대를 맞아 새로운 역사학을 모색하는 흐름의 한가운데 있다. 한국근대사 연구에서는 오랫동안 근대사를 바라보던 민족 대 반민족의 프레임이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고, 수탈 대 저항이라는 일제 시기를 읽어내던 이분법적 시각을 해체하고 이 시기를 재해석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또 거대한 역사에 가려져 있던 개개인과 역사 속에서 배제되어 있던 주체를 찾아 그들의 삶을 복원하려는 노력도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역사학의 전환기에 한국역사연구회는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3·1운동100주년기획위원회’를 조직하고, 그동안의 3·1운동 연구를 성찰하고 이를 바탕으로 역사학의 미래를 전망하는 ‘3·1운동 100주년 총서’ 《3·1운동 100년》(총 5권)을 내놓았다. 이 총서는 새로운 역사학의 흐름을 반영해 반일 민족운동이자 역사의 거대한 봉우리와 같은 ‘사건’으로만 기억하는 3·1운동을 메타역사적 관점에서 분석해 지난 100년의 연구를 성찰하고,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다양한 주체와 새로운 시선으로 3·1운동을 재구성했다.
1919년으로부터 100년, 역사적 전환기에 발맞추어 역사학 또한 전환의 시대를 맞고 있다. 오늘날 역사학의 변화를 담고 있는 다섯 권의 총서가 앞으로 역사학이 나아갈 길을 모색하는 데 미력하나마 디딤돌이 되기를 기대한다. 대중 역사가들이 이끄는 대중 역사에는 아직도 민족주의적 기풍이 강하다. 하지만 새로운 역사학에는 단일한 대오도, 단일한 깃발도 없다. 근대사 연구에서는 이분법적 구도가 무너져 내리고 광범한 회색지대가 드러난 이래 기존 역사상에 대한 비판과 성찰이 이뤄지고 있으며 다양한 역사상이 새롭게 주조되고 있다. ― 총론〈3ㆍ1운동 100주년, 새로운 역사학의 모색〉중에서
2. 39명의 학자가 선보이는 2019년 유일한 ‘3ㆍ1운동’ 100년의 기록!
한국역사연구회는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2016년, 10명의 중진, 소장학자 들로 구성된 '3·1운동100주년기획위원회‘를 조직했다. 3년의 준비 끝에 39명의 학자가 집필에 참여해, 《3.1운동 100년》을 선보인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는 2019년 많은 문화.학술 행사가 열리고 있지만, 3·1운동 100년의 역사를 기록한 것은 《3·1운동 100년》이 유일하다.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등 3·1운동의 모든 역사가 담겨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또 3.1운동의 역사를 기록하는 데만 그치지 않고, 기존의 역사상에 대한 비판과 성찰을 통해 역사학의 미래를 모색하려 한 데에 큰 의미가 있다. 총서의 기획과 집필에 많은 소장학자가 참여한 것도 눈여겨볼 만하다. 그동안 대화가 부족했던 중진, 소장학자 간의 활발한 소통과 토론은 이 총서를 기획하고 구성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새로운 시도는 위원회의 구성에만 그치지 않았다. 총 39명의 필진을 구성하는 데에서도 명망보다는 문제의식의 참신성 주목해 많은 소장학자가 집필에 참여할 수 있게 했다. 또 네 명의 일본 학자가 집필에 참여했는데, 대표적인 항일운동으로 손꼽히는 3·1운동의 100주년을 기념하는 총서에 한국과 일본의 학자가 함께 이름을 올린 것은 뜻깊은 일이다. 이는 무엇보다 최근 일제 시기 연구에 한일 간 학자들의 교류가 더욱 활발해진 덕분이다. 이렇게 역사연구의 다양한 주체들이 한 데 모여 3·1운동 100주년 총서를 엮어낸 것은, 3·1운동 100년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역사학의 미래를 가늠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3. 《3ㆍ1운동 100년》에 나타난 새로운 역사학 ― 다양한 주체와 공간, 시선으로 바라본 3ㆍ1운동
지금까지 역사적 사건을 기념하는 책들은 으레 사건의 배경, 발달, 전개, 결과와 영향, 의의를 주된 내용으로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와 달리 1권 《메타역사》에서는 지난 100년간 3·1운동에 대한 기억과 상식이 만들어진 과정을 메타역사적 관점에서 접근한다. 3ㆍ1운동이 정치ㆍ사회적 변동에 따라, 남한과 북한, 일본과 동아시아라는 공간에 따라 어떻게 해석되고 쓰여왔는지에 대해 비판적 역사 읽기를 시도한다. 2권 《사건과 목격자들》에서는 제대로 주목받지 못한 3·1운동을 둘러싼 다양한 사건들을 정면에서 다루며, 현재의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사실을 규명하고 그 의미를 재평가하고자 했다. 고종독살설과 2·8독립선언, 제암리 학살사건, 마지막 만세시위 등 3·1운동 관련 사건들을 재검토하고 재구성한다. 또 1919년 3·1운동을 마주한 다양한 주체들의 시선으로 3·1운동을 재현했다. 도쿄 유학 중 혁명을 꿈꾸며 귀국한 청년 양주흡, 경남 산청 출신의 유림 청년 김황, 서울 한복판에서 3·1운동을 비판한 YMCA 총무 윤치호, 3·1운동 탄압을 진두지휘한 일본군 사령관 우쓰노미야 다로, 그리고 세계에 3·1운동을 알린 서양인 선교사들의 이야기를 통해 3·1운동의 다양한 주체들을 생생하게 만날 수 있다. 3권 《권력과 정치》에는 일본과 조선, 지배와 저항이라는 이항 대립적 구도에 가려져 있던 권력과 정치의 역사를 복원하고자 했다. 3·1운동을 둘러싼 사법, 경찰, 군부 등 권력의 대응과 조선총독부, 한국인, 일본인 등 다양한 정치세력의 움직임에 주목했다. 4권 《공간과 사회》에서는 식민지 조선과 식민 본국인 일본은 물론이고, 세계로까지 공간을 넓혀 3·1운동과 관련된 경제와 법, 사회현상을 살핀다. 또 도시 시위·길거리 정치·보통학교 등의 주제를 통해 3·1운동 전후의 조선 사회를 다층적 시각으로 재구성해 공간적 차원에서 경계 넘기를 시도한다. 5권 《사상과 문화》에서는 그동안 식민정책과 독립운동 위주의 연구에 가려져 있던 일제 시기 문화사와 사상사를 정면에서 다룬다. 반폭력사상, 평화사상, 인종 담론, 단군문화, 역사문화, 민족정체성, 여성 정체성, 민족 서사 등에 주목해 3·1동 전후의 조선 사회를 문화사적 시각에서 접근한다.
책속에서
흔히 1919년 3월 1일 만세시위 하면 서울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만세시위를 떠올린다. 교과서에서도 3ㆍ1운동의 발발지로 서울만 거론하거나 서울의 독립선언식을 비중 있게 다루어왔다. 그런데 이처럼 서울만을 강조하다 보면 바로 다음 날부터 전국, 특히 북부 지방에서 잇달아 일어난 만세시위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1919년 3월 1일에는 서울을 비롯해 평양ㆍ진남포ㆍ안주(안남도), 선천ㆍ의주(평안북도), 원산(함경남도) 등 7개 도시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서울을 제외하고는 모두 북부 지방의 도시였다. 이후 만세시위는 보름간 북부 지방을 중심으로 확산되었고, 3월 중순 이후 중남부로 확산되면서 전국화ㆍ일상화되었다. …… 북부 지방이 3ㆍ1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는 사실은 남북분단이라는 현실 속에서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 ―2권 3장〈1919년 3월 1일 만세시위의 재구성〉중에서
윤치호에게 3ㆍ1운동은 회피하고 싶은 위기였다. 그가 보기에 3ㆍ1운동은 국내외 정세도 모르고 힘도 없는 사람들이 식민통치에 대한 불만만으로 조금도 승산 없는 일을 위해 스스로 위험을 불사하는 지극히 비이성적인 사건이었다. 물론 그도 식민통치에 불만이 있었다. 그는 일본이 문명국으로서 기대한 최소한의 개혁도 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에 실망하고 분노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람들의 분노와 독립의지에 공감하기보다는 그들과 거리를 두고 어떻게든 3ㆍ1운동에 연루되지 않으려고 했다. ―2권 9장〈윤치호, 방관과 친일 사이〉중에서
1918년 우쓰노미야 다로는 조선군사령관으로 부임했다. 그는 …… 만세시위가 일어난 원인을 무리하게 강행된 혼인에 비유하기도 했다. 조선은 ‘여자’로, 일본은 ‘남자’로 비유해 ‘남자’가 잠시만 인내했으면 ‘여자’가 혼인을 바랐을 것인데, 무리하게 혼인을 추진한 것이 문제라는 지적이었다. 우쓰노미야가 비유한 혼인은 1910년의 한일강제병합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강제병합이 조선인이 열복(悅服), 다시 말해 기쁘게 복종하는 데 걸림돌이 되었다고 인식했다. 또한 강제병합이 “지나(支那) 이하 동방제방(東方諸邦)의 마음”을 잃게 만들어 일본제국의 팽창정책에도 장애가 된다고 서술했다. 식민통치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조선인의 마음을 얻어야 하는데, 겉으로 드러나는 시설을 갖추는 데 급급했다는 요지였다. 구체적으로는 ‘제1조선인’에 대한 봉급ㆍ임용 등의 차별과 불공평을 해결하고, 적극적으로 그들과 교섭해야 한다고 했다. ―2권 10장〈조선군사령관 우쓰노미야 다로의 눈에 비친 3ㆍ1운동〉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