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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아버지 이순신 : 이충무공행록 이용현황 표 - 등록번호, 청구기호, 권별정보, 자료실, 이용여부로 구성 되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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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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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이순신 전기 가운데 최초로 쓰인 책이다. 이순신을 가장 곁에서 지켜보고 함께 전장을 누빈 이순신의 조카 이분이 지었다. 이순신의 큰형 이희신의 아들인 이분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일찍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어려서부터 이순신의 보살핌을 받았으며, 수군통제사 이순신 곁에서 문서 작성 등의 일을 도왔다. 문장이 뛰어나 조정에 출사해서도 실록 편수관, 연경사 서장관 등을 지냈다. 본래의 제명은 《행록》行錄으로 이순신이 세상을 떠난 지 십오 년쯤 지나 집필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분의 《행록》은 그 후 모든 이순신 관련 기록의 뿌리가 되었다. 이분의 저술이 없었다면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의 이순신의 삶에 대해서는 거의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이순신은 우리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이다. 세계의 많은 군사 전문가들이 이순신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수군 장수로 꼽고 있다.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물리친 영국의 넬슨 제독도 이순신 장군에는 못 미친다는 것이다. 일본인들이 가장 두려워하고 존경한 사람도 이순신이었다. 지금의 동아시아 현실은 풍운이 몰아치던 이순신이 살던 시대와 닮았다. 이 격랑의 시대를 헤쳐나가기 위해서는 홀로 나라를 구하다시피 한 이순신의 지혜를 반추할 필요가 있다. 이순신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이순신 당대의 기록에서 시작하자는 게 이 책의 발행 취지다. 이분의 기록뿐 아니라 관련되는 부분에 여러 당대의 기록을 찾아 덧붙였다. 그리하여 이순신 관련 초기 전기자료의 집대성이라는 의미를 동시에 갖게 되었다.

400년 전에 쓰인 최초의 이순신 장군 전기

“아, 저 넬슨이 비록 무용이 뛰어나다 하나, 만일 오늘날 20세기에 이 충무공과 같이 살고 해상에 풍운이 일어 서로 만나게 된다면, 필경 충무공의 아들뻘이나 손자뻘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나라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롭던 시기에 단재 신채호는 이순신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나라를 구할 ‘제2의 이순신’을 기다리는 신채호의 간절한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지금은 어떤가? 일본이 ‘전쟁할 수 있는 나라’가 되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고, 중국은 세계 최강국 미국과 일전을 불사할 태세다. 그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낀 우리는 또다시 지정학적 숙명론이나 되뇌어야 하는가?
이순신은 홀로 나라를 구하다시피 했다. 일본인들은 그런 그를 가장 두려워하고 그러면서도 존경했다. 힘이 있을 때 평화도 있는 법이며, 상황이 어려울수록 난국 속에서 의연히 나라를 지켜낸 이순신의 지혜를 반추할 필요가 있다.
이순신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 가장 원초적인 자료에서 접근해보자는 게 이 책의 기획취지다. 이순신의 삶을 온전히 기록한 최초의 기록은 이순신의 조카 이분이 지은 《행록》行錄이다. 이순신의 큰형 이희신의 아들인 이분은 이순신을 오랫동안 곁에서 지켜보고 함께 전장을 누빈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부모가 일찍 세상을 뜨는 바람에 어려서부터 이순신의 보살핌을 받았으며, 수군통제사 이순신 곁에서 문서 작성 등의 일을 도왔다.
《행록》은 이순신이 세상을 떠난 지 십오 년쯤 지나 집필된 것으로 추정된다.이순신 자신이 《난중일기》와 《임진장초》 같은 소중한 기록을 남겼지만, 이분의 《행록》이 있었기에 우리는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을 포함한 이순신의 전 생애를 복원해 낼 수 있는 것이다. 《행록》은 그 뒤로 이어지는 이순신에 관계되는 모든 저술의 뿌리이자 젖줄이다.
《행록》은 이순신의 후손들이 간행한 《충무공가승》(1715)과 정조 때 규장각에서 편찬한 《이충무공전서》(1795)에 실려 간행되었다. 지금까지 단행본으로 출간된 것은 소설가 박태원의 역주로 1948년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게 유일하다.
우리는 아직도 이순신을 제대로 모른다. 이 책은 오늘의 젊은 독자들에게 후대에 가공되지 않은 객관적인 이순신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행록》은 거기에 부합하는 훌륭한 기록이다. 하지만 초기기록인 까닭에 소략한 부분이 많다. 그리하여 《행록》과 거의 동시대에 쓰인 다른 서적 등에서 보충할 자료를 광범위하게 찾아 연관되는 부분에 덧붙였다. 따라서 이 책은 《행록》의 한글 번역본이면서 아울러 이순신 관련 전기자료의 집대성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번역에서 특별히 유념한 부분은 인명 표기 등에서 객관적 역사서술이 되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한 가문의 전기기록 성격을 갖고 있는 《행록》을 모든 독자가 애독하는 전기로 한 걸음 나아가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하여 박태원 등이 《이충무공행록》이라고 이름붙인 것을 넘어 《작은아버지 이순신》이라는 보다 친근한 이름으로 새로운 번역본을 세상에 내놓는다.

옮긴이의 말

“대체로 이 충무공의 역사를 보면 넬슨과 같은 것이 많으니, 해전에서의 뛰어난 능력만이 아니라, 세세한 일까지도 같은 것이 많았다. 초년에 이름을 알아주는 이가 많지 않았던 것이 같고, 말단 무관으로 긴 세월 동안 묻혀 있던 것이 같고, 끝내 적의 함대를 쳐부순 후 승전고를 올리고 개선가를 부를 때에 적탄에 맞아 눈을 감은 것도 같고…
그렇지만 저들은 수백 년 동안 열강과 경쟁하던 터라 전쟁에 익숙하였고, 나라 금고에는 억만금의 재화를 쌓아두어 군비에 쓰이도록 하였고, 기계공창에서는 수천 문의 대포를 제조하여 군사작전에 쓰이기를 기다렸으니, 넬슨은 아무런 깊은 책모와 원려 없이 다만 뱃머리에 높이 앉아 휘파람이나 불고 있었을지라도 승리를 거두었을 것이다.
이 충무공은 이와 같지 않았다. 군량이 고갈되었는데 준비하지 않으면 누가 준비하며, 무기가 무디고 낡았는데 제조하지 않으면 누가 그것을 제조하며, 병력이 줄고 쇠잔해졌는데 자신이 모집하지 않으면 누가 모집하며, 배의 운행이 느리고 둔한데 개량하지 않으면 누가 개량할 것인가.
그런데도 한편으로 동료인 원균 같은 자의 시기와 질투를 받았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조정 간신배들의 참소를 당하였다. 넬슨으로 하여금 적병이 나라를 이미 거덜내버린 때를 당하여 이와 같은 곤란을 겪게 하였다면, 과연 성공할 수 있었을까?
급기야 원균이 대패하여 이 충무공이 6,7년을 노심초사하며 길러낸 용맹한 장수와 군졸들이며 군량과 선박을 모두 화염 속에 쓸어넣어 버린 후에, 십여 척 남은 깨진 배와 160여 명의 새로 모집한 군졸로… 바다를 뒤덮을 기세로 밀려오는 수천 척의 적선과 겨루게 되었다.
이순신이 바다를 향하여 한 번 호령하니 물고기와 용이 그의 위엄을 돕고, 하늘과 해가 빛을 잃고, 참담한 도적의 피로 온 바다가 붉게 물들었으니, 이 충무공 외에는 고금의 수많은 명장을 다 둘러 보아도, 이 일을 능히 해낼 자 실로 없을 것이다.
아, 저 넬슨이 비록 무용이 뛰어나다 하나, 만일 오늘날 20세기에 이 충무공과 같이 살고 해상에 풍운이 일어 서로 만나게 된다면, 필경 충무공의 아들뻘이나 손자뻘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수군제일위인 이순신전》에 실린 신채호의 글을 다듬은 것이다. 이 글이 발표된 때는 나라가 바람 앞의 등불 같던 1908년이었다. ‘제2의 이순신’을 고대하는 신채호의 심정이 절절이 묻어난다. 이순신이 아무리 위대하기로소니 당대 세계 최고의 해군 명장 넬슨을 이순신의 아들, 손자뻘이라니, 너무 지나치다 싶은 독자에게는 다음 글을 읽어볼 것을 권한다.

“내가 평생을 두고 경모하는 바다의 장수는 조선의 이순신이다. 이순신 장군은 인격이나 장수의 그릇, 모든 면에서 한 오라기의 비난도 가하기 어려운 명장이다. 호레이쇼 넬슨이 세계적인 명장으로 명성이 높은 것은 누구나 잘 안다. 하지만 넬슨은 인격이나 창의적 천재성에서 도저히 이순신 장군에 필적할 수 없다.”

신채호와 거의 동시대를 살면서 일본 해군대학교 교장을 지낸 사토 데쓰타로의 글이다. 임진전쟁에서 이순신에게 치욕적인 수모를 당한 나라 해군 장성의 말이니 좀 더 객관적인 평가에 가까울 수 있겠다.
우리는 아직도 이순신을 제대로 모른다. 신채호의 표현이 당대의 민족적 과제 앞에서 적지않이 감상에 치우친 점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동아시아 세계를 되돌아볼 때면, ‘제2의 이순신’을 목 놓아 기다리던 그의 심정이 이해될 법하다. 일본이 가장 두려워하면서 존경하던 인물은 이순신이었다. 이순신을 다시금 역사의 전면으로 불러내는 이유다.

이순신을 제대로 이해하는 일은 그의 당대에서 시작할 필요가 있다. 최초의 이순신 전기는 그를 가장 곁에서 지켜보고 함께 전장을 누빈 조카 이분이 쓴 《행록》行錄(이후로는 이광수와 박태원의 선례에 따라 《이충무공행록》으로 표기)이다. 이순신 자신이 《난중일기》와 《임진장초》 같은 소중한 기록을 남겼지만, 이분의 《이충무공행록》이 있었기에 우리는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을 포함한 이순신의 전 생애를 복원해 낼 수 있는 것이다. 《이충무공행록》은 이순신에 관계되는 모든 저술의 뿌리이자 젖줄이다.
《이충무공행록》이 집필된 정확한 연도는 알 수 없지만, 임진전쟁 이후 이분의 삶과 그가 1619년에 세상을 떠난 것으로 미루어, 대략 1610년 어름에 쓰인 것으로 유추할 수 있겠다. 뒤이은 이순신에 관한 기록은 최유해의 《행장》行狀과 이식의 《시장》謚狀이다. 1640년대 초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며, 내용의 유사성을 볼 때 두 기록 모두 《이충무공행록》을 저본으로 하였음이 분명하다. 《이충무공행록》은 이순신의 후손들이 간행한 《충무공가승》忠武公家乘(1715)과 정조 때 규장각에서 편찬한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1795)에 실려 간행되었다. 인쇄본 《이충무공행록》은 지금은 전하지 않는 초기 필사본에 비해 내용에 다소의 가감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1643년 인조 때 받은 시호 충무忠武에 관한 사항이 들어가 있는 것이 대표적이다.

큰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충무공행록》이 단행본으로 출간된 것은 소설가 박태원의 역주로 1948년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게 유일하다. 그 밖에는 여전히 ‘충무공전집’ 속의 한켠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이순신은 우리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임에 틀림없다. 오늘의 젊은 독자들이 이순신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데 보탬을 주기 위해 《이충무공행록》을 단행본으로 선보인다. 우리의 목표는 독자들에게 가장 날것으로서의 자료를 풍부히 제공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동시대의 자료들을 연관되는 부분에 광범위하게 부기함으로써, 독자의 이해를 돕고 내용을 풍성히 하였다. 이 책은 《이충무공행록》의 한글 번역본이면서 아울러 이순신 관련 전기자료의 집대성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번역에서 유념한 것은 한 가문의 전기에서 모든 독자가 애독하는 전기로 한 걸음 나아가게 해보자는 것이었다. 등장인물의 표기를 객관적 역사서술이 되도록 한 것은 그 때문이다.

책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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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은 스물여덟 살 되던 해 가을에 훈련원 별과 시험을 보았다. 달리던 말이 거꾸러지며 땅에 떨어진 그는 왼쪽 다리뼈가 부러졌다. 지켜보던 사람들은 모두 이순신이 죽었다고들 말하였다. 하지만 그는 한쪽 발로 일어서서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껍질을 벗겼다. 그리고 버드나무 껍질로 부러진 다리를 싸맸다. 시험장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그를 장하게 여겼다.
이순신은 서른두 살 봄에 정기 무과시험式年試 병과丙科에 합격하였다. 그는 무과 경전을 읽고 뜻을 풀이하는 데 막힘이 없었다. 이윽고 황석공黃石公의 고사*에 이르자 시험관이 물었다.
“장량張良이 적송자赤松子를 따라가 놀았다고 하였으니, 장량은 과연 죽지 않았을까?”
이순신이 대답하였다.
“삶에는 반드시 죽음이 있기 마련입니다. 《자치통감강목》**에도 ‘임자년壬子年에 유후留侯 장량이 죽었다고 하였으니, 어찌 신선을 따라갔다 하여 죽지 않았을 리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다만 공연한 말일 따름입니다.”
그러자 시험관들은 서로 쳐다보며 탄복하였다.
“이것을 어찌 무인이 알 수 있다는 말인가.”

이순신은 벼슬길에 오른 영광을 아뢰기 위해 조상의 묘에 성묘하러 갔다. 무덤 앞에 세운 석인상石人像이 넘어져 있는 것을 보고, 하인 수십 명을 시켜 일으켜 세우게 하였다. 하지만 돌이 무거워 여럿의 힘으로도 돌을 움직일 수 없었다. 이순신이 하인들을 꾸짖어 물러서게 하고는 웃옷을 벗지도 않은 채 돌을 등에 지고 힘을 쓰니, 석인상이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보고 있던 사람들이 힘으로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고들 하였다.

이순신은 본디 천성이 나돌아다니기를 좋아하지 아니하여, 비록 한양에서 나고 자랐지만 아는 이가 드물었다. 오직 서애 유성룡만이 같은 동리의 어릴 적 동무라서 언제나 그가 장수의 재목임을 알아주었다.
율곡 이이가 이조판서로 있을 적의 일이다. 이순신의 이름을 듣고 또 같은 종씨임을 알게 된 이이는 유성룡을 통해 한번 만나고 싶다고 청하였다. 유성룡은 이순신에게 이이를 만나보라고 권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나와 율곡이 같은 성씨라서 만나 볼 수 있지만, 그가 이조판서로 있는 동안에 만나보는 것은 옳지 못하다”며 끝내 찾아가지 않았다.

그해 겨울에 함경도 동구비보의 권관이 되었다. 이때 함경감사가 되어 부임한 이후백이 각 진을 순행하며 변방 장수들의 활쏘기 능력을 시험하였는데, 장수들 가운데 벌을 면한 자가 드물었다. 하지만 동구비보에 들른 감사는 평소에 이순신의 평판을 듣고 있던 터라, 매우 친절히 대해 주었다. 그래서 공이 조용히 감사에게 진언하였다.
“사또의 형벌이 너무 엄해서 변방 장수들이 손발 둘 곳을 모를 지경입니다.”
감사가 웃으며 대답하였다.
“그대의 말이 옳다. 그러나 내 어찌 옳고 그른 것을 가리지 않고 그러겠는가.”

1579년 봄에 임기가 차서 서울로 돌아와 훈련원에서 근무할 때의 일이다. 병조정랑 서익이 자기와 가까운 사람을 순서를 건너뛰어 참군參軍으로 올리려 하였다. 이순신은 담당관으로서 허락하지 않으며 서익에게 말하였다.
“직급이 아래인 사람을 순서를 건너뛰어 위로 올리면, 당연히 승진할 사람이 승진하지 못하게 되니 공평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법을 바꿀 수도 없습니다.”
서익은 위력을 내세워 자신의 뜻을 강행하려 하였으나, 이순신은 굳게 버티며 따르지 않았다. 서익은 크게 화를 냈지만, 감히 자기 마음대로 임명할 수는 없었다. 온 훈련원 사람들이 이를 가리켜 말하였다.
“아무개는 병조정랑이면서 일개 봉사奉事*에게 굴복당하고 말았구나.”
서익은 이 일로 마음에 큰 앙심을 품었다.
이순신이 훈련원에 있을 때, 병조판서 김귀영이 자신의 서녀庶女를 이순신의 첩으로 주려고 하였다. 이순신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일언지하에 중매를 거절하였다.
“벼슬길에 갓 나온 사람이 권세가의 집에 발을 들여놓아서야 되겠는가.”

그해 겨울에 이순신은 충청병사의 군관이 되었다. 그가 거처하는 방에는 옷과 이불밖에 가재도구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부모님을 뵈러 고향에 다녀올 때는 반드시 남은 양식과 반찬을 기록한 다음 양식 담당자에게 돌려주었다. 이 같은 이야기를 전해 들은 충청병사는 그를 사랑하고 존중하였다.
어느 날 저녁이었다. 술에 취한 충청병사가 이순신의 손을 끌며 어느 군관의 방으로 가자고 하였다. 그 사람은 충청병사와 평소부터 친한 사이라서 군관으로 와 있는 사람이었다. 이순신은 대장이 사사로운 일로 군관을 찾아가는 것은 마땅치 않다고 생각하여, 짐짓 취한 척 충청병사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사또, 어디로 가자고 하십니까?”
상황을 깨달은 충청병사가 주저앉으며 말했다.
“내가 취했군, 취했어.”

1580년 가을에 이순신은 발포 만호가 되었다. 이순신을 시기하여 참소하는 말을 들은 전라감사 손식이 이순신에게 벌을 주기 위해 순행차 능성綾城*에 들렀다. 그는 이순신에게 자신을 영접하라고 불러다가 진법陳法 서책을 강독하게 하고 진형도를 그리게 하였다. 이순신은 강독을 마친 다음 붓을 들고 아주 정교하게 진형도를 그렸다. 손식이 한참 동안 몸을 꾸부리고 들여다보고는 말하였다.
“어쩌면 이렇게도 세밀하게 그리는고.”
그리고 이순신의 조상이 누구인지 물었다.
“내가 진작 몰라본 것이 한이로구나.”
손식은 그 후로는 이순신을 정중히 대우하였다.
[P. 9] 이순신은 1545년(인종 원년, 가정嘉靖 24년) 3월 8일(양력 4월 28일) 자정 무렵子時 한성 건천동 자택에서 탄생하였다. 이순신을 보고 점쟁이가 말하였다.
“이 아이는 나이 50이 되면 북방에서 부월斧鉞을 손에 쥐는 대장이 될 것이다.”
[P. 10] 스물두 살 되던 해 겨울에 때 비로소 무예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동료들 가운데는 완력이나 말타기, 활쏘기에서 그를 따를 자가 아무도 없었다. 이순신은 성품이 고결하고 늠름하였다. 그리하여 같이 어울리던 무사들이 자기네끼리는 종일 농담을 주고받고 희롱하면서도, 이순신에게만은 감히 ‘너, 나’ 하지 못하고 언제나 공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