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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제1부 1952-1969 01 토끼의 노래 02 거울 속의 나, 악보 속의 세계 03 비틀스 04 내가 음악을 꽤 좋아하는구나 05 특별한 시간의 시작 06 장밋빛 인생 07 1967년부터 1969년까지 08 두 개의 흐름이 교차하는 지점
제2부 1970-1977 09 히비야 야회음악당과 다케미쓰 씨 10 민족음악, 전자음악, 그리고 결혼 11 무대를 따라 여행에 나서다 12 같은 언어를 가진 사람들 13 카운트다운
제3부 1978-1985 14 YMO, 시작하다 15 YMO, 세계로 16 YMO에 반기를 들다 17 길을 떠나야 할 때 18 음악 도감
제4부 1986-2000 19 베이징에서 20 지금 당장 음악을 만들어라 21 뜻밖의 선물 22 가족과 함께 뉴욕으로 23 Heartbeat 24 세기의 종언
제5부 2001- 25 세계가 변해버린 날 26 새로운 시대의 일 27 있는 그대로의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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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책소개
동서양과 장르를 뛰어넘은, 시대의 음악가 류이치 사카모토 인생을 함께한 음악과 철학을 말하다
유치원에서 처음 접한 피아노와 작곡부터 드뷔시와 비틀스, 존 케이지 그리고 YMO까지, 류이치 사카모토를 둘러싼 음악 세계 류이치 사카모토는 어릴 적 유치원에서 처음 피아노와 작곡을 접했다. 자신의 경험이 음악으로 재탄생한 순간에 “근질거리는 듯한 기쁨”과 “위화감”을 동시에 느꼈다는 그는 10대 시절 내내 음악을 계속 공부하며 클래식 음악과 팝은 물론 현대음악으로까지 천천히 자신의 세계를 넓혀갔다. 한때는 자신을 드뷔시의 환생이라고 여기기도 했지만, 이윽고 서구권의 음악을 넘어 인도, 오키나와, 아프리카 등 민족음악에도 관심을 기울였고, “민중을 위한 음악”을 지향하며 전자음악에서 음악의 대중화 방안을 모색하기도 했다. 호소노 하루오미, 다카하시 유키히로와 함께한 YMO 밴드 활동은 대학원 졸업 후 “일용직” 연주자로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그에게 일대 전환을 가져다주었다. 어릴 적부터 현대음악을 접하며 대학 교수에게 사사했던 그와 달리 록과 팝을 기반으로 했던 호소노와 다카하시의 음악은 사카모토에게 새로운 자극을 주었고, 그가 다양한 음악을 흡수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한때 YMO의 명성과 멤버들 사이의 갈등은 그를 억압하는 힘으로 작용하기도 했지만, 류이치 사카모토는 이 과정을 통해서 비로소 “어른”이 되었다고 고백한다.
세계적인 영화감독 베르톨루치와 함께한 「마지막 황제」 작업기 류이치 사카모토를 설명하는 수식어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의 이름을 대중적으로 알린 장르는 영화음악일 것이다. 그는 이 책에서 자신에게 영화음악가로서 명성을 안겨준 영화 「마지막 황제」 작업기를 애정을 담아 서술한다. 애초 배우로 이 영화에 참여했던 그는 제국주의자 아마카스 마사히코 역할을 맡아 깊은 고민에 빠지기도 하고, 일제의 괴뢰국 만주국의 흔적이 남은 촬영장에서 위화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던 중 베르톨루치 감독의 갑작스러운 요청으로 현장에서 사용할 생음악을 작곡한 것을 계기로 영화음악 전체를 맡게 되었다. 인터넷이 발달하지 못했던 당시 사카모토와 영화 제작팀은 BBC와 NHK의 회선을 이용해 데이터를 주고받는 방식으로 2주일 만에 음악을 만들어냈고, 그는 이 음악들을 통해서 아시아 최초로 아카데미 음악상을 거머쥐었다.
학생운동을 주도한 10대 소년에서 반전과 환경 문제에 목소리를 높이는 사회 운동가로 류이치 사카모토는 일본의 대표적인 학생운동인 전공투 세대의 일원으로서 10대로서는 드물게 학생운동을 주도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교복과 교모의 철폐, 시험 및 생활 통지표 폐지 등을 외치며 수업 거부 운동을 이끌던 그는 대학에 진학한 뒤에도 교정보다는 데모에 나가 민중과 함께 호흡하고자 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사카모토가 직접 목격한 9-11 테러를 계기로 더욱 공고해져서 그가 평화와 반전(反戰)에 목소리를 높이는 방향으로 이어졌다. 또한 그는 내전과 기아의 문제가 본질적으로 환경 문제와 이어진다는 의식하에 “모어 트리즈(More Trees)” 프로젝트를 시작하여 지구 온난화 억지에 힘쓰고 있다.
책의 말미에서 류이치 사카모토는 자신이 스스로 음악가임을 자처할 수 있는 것은 순전히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 덕분이었다고 말한다. 그에 걸맞게 이 책에는 사카모토에게 영향을 준 음악, 문학, 영화 등 다양한 예술에 대한 이야기는 물론, 가족과 친구, 연애와 결혼 이야기 등 사적인 일들까지 기록되어 있다. 어린 시절부터 그가 접하고 흡수한 것들은 오늘날까지 그의 예술세계를 직조하고 있다. 류이치 사카모토가 직접 이야기한 자신의 반생을 사진과 함께 생생하게 보여주는 이 책은 그가 세상에 내놓은 최초의 자서전으로서, 국내 팬들에게 더없이 좋은 선물이 될 것이다.
책속에서
[P.35] 초등학교 5학년 때, 도쿠야마 선생님이 작곡을 배워보라고 하셨다.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어서 어리둥절했다. … 작곡이라는 게 대체 무엇인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어머니도 아들이 작곡 공부를 한다는 것은 도저히 현실적인 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런 건 전혀 할 생각이 없어서 아버지도 어머니도 나도 모두 그 제안을 거절했다. “작곡이라니, 아휴, 그런 건 도저히 못해요”라고.
[P. 44] 드뷔시를 만난 건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처음 들은 곡은 다른 외삼촌의 레코드 컬렉션에 있던 현악 사중주곡이었다. 여기에도 엄청난 충격을 받아서 금세 빠져들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나 자신을 드뷔시의 환생이라고, 거의 진심으로 믿었다.
[P. 111] 우선은 노동자의 동지가 되자는 생각에서 지하철 공사장으로 아르바이트를 나갔다. 간다 역 공사였다. 지하의 엄청 깊은 곳에서 무거운 돌이며 철골을 날랐다. 하루에 아홉 시간을 일해서 4,500엔 정도를 받았던 것 같다. 당시로서는 상당한 액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