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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서문
들어가며
제1장 제도의 탄생
제2장 모집책으로서 일본 제국
제3장 포주로서의 제국
제4장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 일본의 강제 동원
제5장 무기로서의 남성 성기
제6장 침묵의 시작
제7장 폭로되는 만행
제8장 역사를 위한 투쟁
제9장 정의와 명예를 위한 투쟁
제10장 성별 간의 전쟁
끝맺으며
미주
옮긴이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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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 네덜란드 기자가 쓴 성폭력 문제와 여성 인권 이용현황 표 - 등록번호, 청구기호, 권별정보, 자료실, 이용여부로 구성 되어있습니다.
등록번호 청구기호 권별정보 자료실 이용여부
0003152785 305.90695 -24-7 서울관 사회과학자료실(208호) 이용가능
0003152786 305.90695 -24-7 서울관 1층 중앙홀 지정도서
(자료실내 이용)
B000121816 305.90695 -24-7 부산관 주제자료실(2층) 이용가능

출판사 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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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브리지트 아르스는 이 책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생생한 경험을 고발하고 있다. 저자는 피해자들의 개인적 증언뿐만 아니라 가해자들과 기타 관련자들의 증언을 통해, 이 비극적 사건의 충격적인 진실을 폭로한다. 이들의 증언은 읽는 이의 숨통을 죄어올 정도로 참혹하며, 인간의 존엄성이 철저히 유린된 순간들을 생생히 전해준다.

일본군은 점령한 모든 지역에 위안소를 설치했으며, 위안부로 이용된 여성들의 출신과 상황은 다양했다. 일본군은 일부 빈곤층 일본 여성들을 비롯해 점령지역의 소녀들을 표적으로 삼아, 이들을 모집하거나, 매매하거나, 납치하거나 속이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위안부를 조달했다. 모집 방법은 지역에 따라 달랐으며, 자원과 강제 동원의 경계는 모호했다. 따라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정하는 기준 역시 명확하지 않다. 일부 추정에 따르면 피해자의 수는 8만 명에서 40만 명에 이른다고 하나, 약 20만 명이 피해자로 인정되고 있다. 이 중 거의 절반이 한국 여성으로, 약 400명의 네덜란드 여성도 포함되어 있었다.

저자는 이 책에서 한 챕터를 네덜란드령 동인도(현 인도네시아)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할애하고 있다. 과거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도 위안부 제도가 대규모로 시행되었으며, 인도네시아, 네덜란드, 중국 여성들이 일본군의 조직적인 성 노예로 이용되었다. 저자는 문화인류학자로서, 인간성을 철저히 파괴한 위안소 설립의 원인을 일본 사회와 문화, 그리고 이를 고안한 집단에서 찾는다. 저자는 일본 남성들이 전통적으로 성적 쾌락을 위해 여성을 착취하는 것을 권리로 여겨왔으며, 현대 일본의 성도덕 또한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주장한다. 위안부 제도는 사실상 전쟁 중 여성에 대한 성폭력을 막기 위한 구실로 활용되었을 뿐이다. 또한, 저자는 제2차 세계대전 전후 및 전쟁 중 위안부 피해자들의 현실을 비추어, 나치 독일, 베트남,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방글라데시 등지에서도 유사한 제도가 존재했다고 지적한다.

이 책은 단순히 흥미로운 사건의 기록이 아니라, 저자가 1999년 대한민국에 위치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보호시설을 방문한 후 받은 충격에서 비롯된 결과물이다. 저자의 개인적인 경험과 감정이 책 전반에 드러나며, 이는 학문적 객관성을 넘어선 저널리스트적인 어휘 사용에서 확인할 수 있다.

책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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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1~12] 이 책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여성들의 이야기이며 20세기 여성 인권이 침해당한 가장 야만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이야기는 약 20만에서 40만 명으로 추정되는 한국, 인도네시아, 네덜란드, 중국, 필리핀 및 다른 국가 여성이 제도적으로 강간을 당했던 무자비한 시스템에 관한 것이다. 이 제도는 1931년 일본의 만주 침공과 함께 시작되어 1945년 일본이 연합군에 항복할 때까지 15년간 지속된 전쟁에서 일어났으며, 철저히 인종 차별적이며 성차별적인 제도였고, 특히 가난한 소녀들이 피해를 보았다. - <들어가며>
[P. 19] 사진을 담은 액자들은 일본군 ‘위안부’의 역사를 설명해 준다. 일본은 군인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이 제도를 도입하였다. 일본군은 처음에 일본인 매춘부를 이용했지만, 그 수가 군인들의 수요를 충족시키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그들은 한국, 중국 그리고 필리핀과 같은 다른 나라 출신의 소녀들을 ‘강간 캠프’로 데려왔다. 이 용어는 유엔이 꾸밈없이 사용한 표현 그대로다. - <제1장 제도의 탄생>
[P. 51]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에 따르면, 일본군 ‘위안부’의 대부분(80-90%)은 한국 여성이었다. 일부 일본 연구자들은 그 수치에 의구심을 가진다. “한국인 일본군 ‘위안부’ 숫자는 50% 미만이었을 겁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한국 여성보다 중국 여성이 분명 더 많았습니다.”라고 하야시 히로후미 교수는 주장하였다. 중국에 가장 많은 위안소가 위치해 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의 주장은 이 중국 지역의 위안부 모집에 관련된 문서에 근거한 것이다. 부대장 한 명이 1942년 일본 전쟁성 회의에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위안소는 중국 북부에 100개, 중국 중부에 140개, 중국 남부에 40개, 동남아시아에 100개, 태평양 지역에 10개 그리고 사할린에 10개 등으로 총 400개가 설립되었다.”4 - <제2장 모집책으로서 일본 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