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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명/저자사항
制勝方略 / 金宗瑞(朝鮮) 著 ; 朝鮮史編修會 編 인기도
발행사항
京城 : 朝鮮總督府, 1936
청구기호
古 355.40951 ㄱ866ㅈ
자료실
[서울관] 귀중서고(1층 대출대)
형태사항
2卷1冊 ; 25.7×15.7 cm
제어번호
OLDP1000000085
주기사항
裝幀: 線裝
解說: 昭和十一年(1936)…朝鮮史編修會
刊記: 昭和十一年(1936)三月三十一日發行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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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箸者 周邊

『制勝方略』은 文字 그대로 勝利를 制覇하는 묘한 方策을 記錄해 놓은 朝鮮王朝時代의 國防 備邊策에 關한 兵書中에서는 손꼽을 수 있는 良書라 아니할 수 없다.

本書의 著者는 朝鮮王朝初期의 金宗瑞였으며 宣祖때 李鎰이 增補하고 肅宗때 李選이 跋文과 刻板을 하여 現在에 이르고 있는바 원래는 奎章閣 秘藏의 二卷一册 半葉匡郭에 版心은 上下黑魚尾로 되어 있는것을 日帝治下 韓國侵略時代 朝鮮史編修會에서 景印해(朝鮮史料叢刊第12)낸 單卷이 있어 우리가 容易하게 求覽할수 있다.

따라서 本書의 著者는 넓은 意味에서 金宗瑞 및 李鎰이라 할 수 있고 이의 重刊에 有功者 李選도 本書의 名譽 著述者(?)格이 된다고 하겠다. 이와같은 意圖下에서 本書의 著者들에 關한 간략한 生涯를 살펴봄은 該書를 根本的으로 理解하는데 있어서 時代的 思想的 背景이 解明되리라는 揣摩끝에 우선 著者 周邊을 둘러보려 한다.

金宗瑞(1390〜1453)는 1390年(恭讓王2)에 字를 國卿, 號를 節齋라 한 本貫 順天의 都摁制 錘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兵書와 漢書를 耽讀하던 그는 15歲 되던 1405年에 당당히 文科에 及第하였으며 뒤이어 1419年에는 司諫院右正言이 되고 33歲때 賑濟敬差官과 持平을 歷任한 뒤 1429年에는 右副代言을 지냈다. 그리하여 43歲되던 1433年에 비로소 咸吉道都觀察使가 되어 本格的으로 東北方野人을 방어하고 北方을 開拓하는데 전심전력하였다. 이때 그는 本書를 通해서 北方 備邊策에 資하도록 力說하였다.

그의 벼슬은 北方의 野人을 소탕하고 六鎭을 개척하여 大虎라는 存在로 알려진 뒤 出世가도를 순탄히 달려 刑曹, 禮曹, 判書(1440) 右參賛(1446) 左賛成겸 平安道都節制使(1450) 右議政〔1451)등 死去時까지 政丞으로 端宗을 補弼하다가 首陽大君에 의하여 1453年 두 아들 承珪, 承璧과 함께 擊殺되었는데, 이때 두 아들만 죽고 그는 겨우 목숨을 건졌으나 大逆謀叛罪로 梟示되어 癸酉靖難으로는 제一차 희생자가 되었다가 1746年(英祖22) 復官되어 忠翼이라는 諡號를 받았다.

그는 1449年에 權踶등이 讐校한 高麗史가 公正치 못할 뿐 아니라 記述上에도 오류가 있음을 지적하고 改撰함에 知春秋舘事가 되어 이의 撰述을 速行시켰다.

따라서 高麗史의 편찬 책임은 從來의 鄭麟趾가 아닌 金宗瑞였는데 그가 癸酉靖難에 大逆罪로 死刑되어 脚光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인 것이다.

또한 그는 1452年 世宗實錄 摁裁官을 거쳐 高麗史節要를 監修編纂하는 등 文武를 兼全한 智將이며 賢臣이었다.

特히 金宗瑞의 北方開拓과 爲國 정신은 六鎭 設置등 현재 우리 나라의 영토로 國土를 確定지운데 功勞로 나타나고 있으며 史書編纂 및 刊行에도 남다른 偉勲이 있었던 것이다.

增補한 李鎰(1583〜1601)은 字를 重卿이라한 龍仁사람으로 觀察使를 지낸 伯持의 후손으로 20여세에 武科에 及第한 뒤 全羅道 水軍節度使로 있으면서 海岸을 경비하다가 1583年(宣祖16) 野人尼湯介가 2萬餘騎로 北邊에 侵入하여 慶源이 함락당하고 鍾城이 포위되어 國情이 累卵의 危機에 處하자 國命으로 慶源府使가 되어 적을 격퇴하는 등 功勞가 많았다.

이렇게 그는 宣祖朝에 北道諸鎭을 歷守하면서 北邊防禦에 重要한 役割을 맡았다. 여기서 그는 北道 防禦에 關한 새로운 理念에 따라 制勝方略을 增補加筆하여 武將들에게 地名, 敵地狀況, 堡名, 向化野人등의 소굴(部落)등을 일일이 探索, 記述把握해 놓음으로써 歷代 武將들에게 참고가 되도록 하였다.

따라서 本書를 유용하게 利用한 將軍들은 北方 野人 防禦에 절대적인 效果와 의욕적 인 戰鬪로 인도되기 까지하였던 것이니 本書가 國防上 미치는 兵書的 영향은 實로 重且大한 立場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1586年 尼湯介가 會寧등지에 再侵入해 오자 會寧府使의 重任을 띠고 그 本據地를 소탕하는등 종횡무진으로 金宗瑞 이후 처음 속시원히 北方 野人을 무찔렀을 뿐 아니라 北道 防禦에 핵심적 役割을 擔當하였다. 이같은 諸功을 참작한 나머지 李鎰은 咸鏡北道 兵馬節度使에 발탁 되어 이때부터 本書의 增補를 본격적으로 速行監修하였다.

이렇게 승승장구 勇名街를 주름잡던 그에게 1592年에 勃發한 壬辰倭亂은 決定的인 충격을 주었다. 즉 그는 壬亂이 일어나자 巡邊使로 任命되어 倭軍을 防禦 擊滅시킬 重任을 띠고 出征하였으나 워낙 火急히 侵入한 그들인지라 尙州와 忠州에서 크게 敗하였다. 그는 우선 一針을 맞은 후 臨津江과 平壤등을 防禦하는 東邊防禦使가 되었으나 破竹之勢로 北上하는 事前武裝訓練된 倭軍을 막지 못하고 밀려가는 悲運을 맛보아야했다. 그러나 明軍의 來援으로 勇氣를 되찾아 1593年 平安道兵馬節度使로서 平壤수복에 功을 세웠다.

그는 서울이 수복되고 國家가 戰時체제로 바뀜에 따라 訓練都監이 設置되자 左知事로 軍隊를 훈련시키는 등 후진양성에 心血을 기우렸다. 뒤에 咸北 巡邊使와 忠淸 全羅 慶尙 三道 巡邊使를 歷任하는등 武勇大將직에도 있었다. 1600年 咸南兵馬節度使가 되었다가 召還을 當해 上京中 定平에서 病死하니 享年이 64歲였다 뒤에 左參賛에 追贈하였으며 諡號를 壯襄이라고 하였다.

重刊者 李選(1631〜1692)은 字를 公擇하라 하였다가 뒤에 擇之라 하였으며 號는 芝湖 또는 小白山人이고 本貫은 全州로서 世宗大王子 廣平大君 璵의 後孫인데 右議政 厚源의 參男으로 1631年 12月 24日에 誕生하였다.

母 光州金氏는 沙溪 金長生의 女로 父母 兩家門이 모두 學問하는 분위기로 가득차 있었기 때문에 李選의 學問的인 熱意와 天賦의 素質은 그에게 많은 業績을 要求하고 있었다. 그는 當代 저명한 學者인 金集 宋時烈등에게 學問을 배우고 25歲에 進士가 되었으며 32歲(1657)에 春塘臺文科 丙科에 及第하여 檢閱에 初任함을(1664) 비롯하여 奉敎(1665) 正言(1667) 校理(1668) 吏曹佐郞(1668)등을 歷任하면서 그의 學問的인 기반과 함께 政治的인 均衡도 잃지 않았다.

이렇게 成長한 李選은 1673年 應敎로 在職中 魯山君墓所에 時祭하고 皇甫仁, 金宗瑞등의 伸寃을 上疏하였으며 그로부터 2年뒤에는 刑曹參議로 있다가 宋時烈이 축출되고 南人이 세력을 잡자, 사직하였다가 1680年 庚申大黜陟으로 西人이 집권한뒤 咸鏡道觀察使에 任用되었다.

1686年 이후 冬至使가 되어 淸나라에 다녀온 후 吏曹參判을 지냈고 己巳換局(1689)으로 다시 西人이 失脚하자 機張에 流配되어 滴居 3年중 1692(肅宗18) 2月 1日 62歲를 一期로 卒去하였는데 2年뒤인 1694年에 伸寃되어 諡號를 正簡이라 하였다.

그는 우리 나라의 古典, 漢籍등 貴重稀小本이 없어짐을 안타가히 여기고 그의 保管 및 整理에 보람있는 일을 해보겠다고 다짐하였다. 따라서 그는 일찌기 史局에 들어가 우리 나라의 傳來的인 漢裝 古本을 求覽하고 그 歷史的 價値에 새삼 놀라 高評하며 그 科學的인 保管 및 維持整理에 苦心하였다. 그리하여 江都, 太白 등 石室에 秘藏을 익혀 典章에 정통하여 文名을 날리기도 하였다.

그는 江都 列朝實錄의 闕佚 傳寫 補完에 힘쓰는 一方 光海君日記를 印刊分藏하였으며 다시금 高麗史 重刊을 請하여 國故整理를 自擔實行하였다.

그뿐 아니라 江都殉節人 沈誢, 李時稷, 宋時榮의 賜號, 靖難功臣 金元亮의 伸寃과 顯宗實錄 改修 璿源譜牒의 修成, 鄭忠臣의 贈謚를 請하였다. 또한 尹灌의 祠를 重修하여 吳延寵을 配祀, 金宗瑞의 祠에 皇甫仁을 追享, 金應河를 配하고 鄭汝昌의 書院을 鍾城에 세워 柳希春, 趙鍚胤을 配하였다.

그는 또한 吉州에 趙憲의 書院을 建立하여 추모하는 등 北道故事宣揚으로부터 文敎를 開發하는등 자못 韓國의 文化財를 重修補完하고 韓國學을 硏究하여 後世人의 龜鑑이 되었는데 本書의 刻板같은 취지의 實行은 그가 副修撰의 資格으로 이와같은 훌륭한 跋文과 重刊이라는 歷史的인 使命및 偉業을 斷行하였던 것이다.

그외 그의 著書로는 黃岡先生實記(5卷1册, 1734年刊), 謚法摠記(1册年紀未詳)芝湖集(13卷6册, 1856年刊)등 重厚한 學問的 作業 과정이 뚜렷이 나타나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重要한 그의 評價와 업적은 制勝方略을 重刊景印하고 考證한데에 있다고 하겠다.

2. 列鎭防禦

制勝方略은 奎章閣圖書의 하나로서 京城帝國大學(現 서울大學校) 附屬圖書館에 貯藏되어 있던 原本 2卷 1册刻木板匡 縱27.0糎 橫20.5糎의 규격을 1936年 3月 日帝侵略下의 朝鮮總督府 朝鮮史編修會에서 景印頒出한 것이다.

原書는 朝鮮王朝 宣祖 21年(1588)에 咸鏡北道兵馬節度使 李鎰이 邊方防禦를 效率的, 能率的, 體系的으로 營爲하기 爲하여 初期 金宗瑞의 著述에다가 增修補筆하여 編成하였으며 뒤에는 1670年에 咸鏡北道兵馬兵事 李選이 그 必要性을 切感한 나머지 重刊해 낸 것이다.(同書 末尾 跋文 參照)

本書가 1936年 3月 서울에서 景印되지 않을때 까지는 奎章閣圖書도 二部밖에는 없었기 때문에 一般人은 勿論 特殊層에 있는 人士들도 容易하게 求覽할 수 없었던 稀貴本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北方邊境의 開拓 및 그 確保는 朝鮮太祖 이래 歷代로 繼承된 重要한 國家의 施策의 하나였다. 따라서 太祖朝에는 鄭道傳, 世宗大王時에는 金宗瑞, 世祖時에는 申叔舟 등이 서로 太祖의 國土 確定 理念에 따라 不斷히 彊域을 擴張하고 野人의 招撫 懷柔 覊縻에 心血을 경주해 왔다.

이리하여 東北方에 六鎭을 설치하고(穩城, 鍾城, 會寧, 富寧, 慶源, 慶興) 西北方에 四君(閭延, 慈城, 茂昌, 虞芮)을 置廢하는등 자못 활발한 北方開拓에 力點的인 防禦 및 設置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와같은 朝鮮初에 있어서의 對野人 政策에는 恩威並用의 外交策을 쓰는 반면 그네들을 有利케하는 社會經濟的인 交渉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李炫熙, 朝鮮前期 來朝野人의 政略的 待遇에 對하여 史學硏究, 18. 申奭鎬博士華甲記念 朝鮮時代硏究特輯, 同, 朝鮮前期 野人의 誘京綏懷策攷 金斗鍾博士 稀壽記念論文集 參照)

그뿐 아니라 野人酋長의 子弟를 人質로 留京侍衛시키기도 하며(李炫熙, 朝鮮前期 留京侍衛野人攷, 향토서울 20) 向化野人을 우대하여 邊患을 종식시키려 하였고(李炫熙, 鮮初 向化野人 拾穗) 一旦 歸化한 者거나 彼地에 있는 者에게도 特殊한 政治的 대우를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李炫熙, 鮮初野人의 授職性格考 史鑑 2輯 參照).

그러나 그네들의 寇略은 그치지 많아 外交的인 두통거리로 化했던 것이다. 비록 三大國是의 하나인 事大交隣主義를 채택 시행하였으나 結果的으로는 均衡的 效果를 걷우지 못하고 말았던 것이다.

따라서 일찍부터 備禦와 交渉을 爲하여 制勝方略을 著述해 내게 된 것이다. 이에 관한 大體的인 內容은 北方전지역에 亘한 山川의 形勢, 路程의 遠近, 城堡의 配置, 行軍의 節目등을 정밀하게 探索 審察하여 기술해 놓은 것이다.

野人의 對南 侵略 행위가 심해지자 朝鮮王朝로서는 綏撫 作戰만을 展開할 수 없어 遠征을 斷行하기도하는 등 北邊의 경비는 국가적인 부담으로 化해갔던 것이기에 本書의 著述的 必要性은 切實히 반영 露呈된 것이다.

이리하여 金宗瑞 이래 咸鏡北道 制勝의 方略을 宣祖朝에 이르러 北兵使 李鎰이 다시금 整理 增修 補完하여 時用에 적절하도록 하였는바 本書 卷1, 卷2의 태반을 이루는 列鎭防禦가 바로 그것인 것이다.

여기서는 各鎭의 形勢, 應變의 策, 鏠燧, 守護, 體探 伏兵, 望海등 配置를 列記하였으며 또한 所屬의 向化 野人部落의 位置, 酋長 戶數등을 비교적 詳細히 附記해 놓을 뿐 아니라 前代에 있어서 防守 應變의 業績도 明示해 놓고 있었다.

本書의 大體的인 內容 파악을 爲하여 卷末에 李選의 跋文을 봄으로서 制勝方略의 本源的인 著述의 必要性이 闡明될 것이다.

『右制勝方略, 未知出於誰手, 而其行蓋久, 意亦節齋金制閫峕事, 若其增補修明, 則又故將李鎰所爲也』

라는 것으로 보면 本書는 누구의 손으로부터 傳해졌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이미 오래전부터 行해지고 있었으며 그 意味 또한 金宗瑞의 그것과 비슷하여 補修 增筆한 것은 李鎰의 업적이라고 하였으며 繼續하여 同 跋文에서는

『賊路遠近, 追撃要害, 以至城池器械, 凡係固邊制敵之策, 與夫被搶奪回之由, 無不畢書備錄, 開卷瞭然, 雖其盛襄有殊, 形勢不俾, 今不可以是應之, 然微此書, 則逞時籌畫事蹟, 亦無從可徵, 要是邊障, 所不可無者, 李鎰之用心, 可謂勤矣』

이라고 하여 本書를 增補 加筆한 李鎰의 偉業을 극구 칭송하고 있다. 또한 同跋文에서는 끝으로

『至若建請取講諸將, 以行殿最, 良非偶爾, 顧今廢墜已久, 無論列鎭罕藏, 即營中堇有一本, 若復見失, 則終至泯沒, 豈不可惜也, 餘爲是惧, 繕寫入榟, 以壽其傳, 凡登將壇者, 倘能持循, 則其 於禦暴不爲無助云爾, 歲庚戌初冬上澣, 北道兵馬 評事完山李選跋』

라는 것으로 北兵事 李選의 重刊 必要性 및 그 切感性 에 비추어 취해진 조치인 것으로 知悉할 수 있는 것이다.

卷1에 收錄된 列鎭防禦의 細目을 보면

西水羅堡……屬慶興

造山堡………屬慶興

鹿屯島………屬造山

慶興鎭………南距造山三十五里

撫夷堡………屬慶興

阿吾地堡……屬慶興

阿山堡………屬慶源

乾元堡………屬慶源

安原堡………屬慶源

慶源鎭………北距訓戎二十五里

訓戎鎭………屬慶源

黃柘坡堡……屬穩城

美錢鎭………屬穩城

穩城鎭………東距美錢二十八里

柔遠鎭………屬穩城

永建堡………屬穩城

潼關鎭………屬鍾城

鍾城鎭………北距潼關十八里

防垣堡………屬鍾城

細川堡………屬鍾城

行營…………鍾城地也

高嶺鎭………屬會寧

會寧鎭………南距古豊山六十里

甫乙下鎭……屬會寧

雲頭城………西距十五里

豊山堡………屬會寧

등이며 다시 卷2에 收錄된 列鎭防禦의 細目을 보면

梁永萬洞堡…屬富寧

茂山堡………屬富寧

富寧鎭………西距玉連四十五里

玉連堡………屬富寧

鏡城鎭………東距海十里

魚游澗鎭……屬鏡城

吾村堡………屬鏡城

朱乙溫堡……屬鏡城

甫老知堡……屬鏡城

寶化堡………屬鏡城

森森堡………屬鏡城

斜亇洞堡……屬明川

明川縣………北距斜亇洞三十五里

將軍坡堡……屬吉州

西北堡………屬吉州

斜下北堡……屬吉州

德萬洞堡……屬吉州

吉州鎭………北距明川縣七十五里

등으로 되어 있음으로서 北邊의 諸鎭 堡 縣 등의 形勢를, 瞥할 수 있다.

西水羅堡는 慶興에 屬해 있다고 하였는데 細註에 보면 北쪽으로는 造山35里 慶興60里의 거리에 있으며 造山을 경유하면 70里가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西水羅堡의 城周圍는 1,270尺, 女墻 99, 擁城 5,曲城 2이있으며 南北門과 泉井이 하나씩 있다. 만약에 被圍하게 되면 不平만 할 수 없어 修治士兵, 24名, 南方 赴防軍士 18名을 두되 혹은 加하고 혹은 減하였다가 一時他堡와 分防하도록 하며 弓子 154, 張長箭 384部, 片箭410部 25介가 完備되어 있음도 말하고 있는 것이다.(同書 卷之1P I)

賊路相距는 北距 甘湯九未六息 20里, 東距阿羊串二息 15里, 北距下大山三息, 阿之羅耳二息 15里로 되어 있고 追邀撃處相距는 東距 朱乙溫泉邊浦頂三息10餘里, 江口厚羅島二息餘里, 阿思即島一息 卯島水路一息으로 되어있다. 따라서 西水羅堡를 中心으로한 對敵防禦 狀況을 자세히 기록해 놓고 있다.

또한 造山 慶興 撫夷 阿吾地等 鎭堡등지에 有變하면 朱乙溫泉邊 浦頂등처에서 追撃하라는 뜻으로 記述해 놓고 있으며 卯島에 다시 有變하면 戰船을 타고 同島로 追擊할 것이고 未及하면 江口厚羅島로 追擊할 것을 明記해 놓았다. 그밖에도

『牛巖烽燧, 烏碣巖守護等處, 有變則同處追撃』(同書卷之1P.I)이라는 것이 있으며 牛巖烽燧는 北距 15里, 烏碣巖守護는 北距 7里, 烏端候望은 南距 3里에 位置해 있음을 明示해 놓음으로서 敵情의 探索과 敵地의 遠近을 揣摩할 수 있게하여 北邊 防禦에 最要한 資料로 삼아 知彼하도록 武將에게 주의를 喚起시키고 있다. 卯島의 位置같은 것도 자세히 闡明하며 軍事上 重要한 資料로 삼게 하는등 細心한 部面에까지 用心하고 있는 李鎰 장군의 옛 모습을 感知할 수 있다.

여기에 故事까지 넣어 野人 侵犯의 一面을 알 수 있게 하였다.

『去戊子年七月兮, 骨看水賊乘皮二百餘隻, 不意突入, 土城木柵, 軍民閑雜人并八十餘名, 東手被擄, 墜下〇者四, 逢箭死者一, 馬十三匹牛十頭, 並被擄去, 牛馬則中路屠殺, 載肉而去, 自古被擄未有若是者 其中送還二名逃還二名, 其時慶興府使金秀文預知賊變, 聞即馳赴先破者, 皮船則可殲賊, 無有而疑有伊應巨, 島有變, 同島馳進, 始聞西水羅之變, 馳救則賊已乘船下海, 此後人所恨者也』(同書 卷之1P.2) 〇표는 不明確한 것임

이라고 하여 戊子年(1588) 7月 骨看賊變때의 野人 骨看의 侵入 狀況 및 그 被害 細目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本書中에 戊子年은 1588年(宣祖21) 7月의 일로 보아야 할 것인데 이해 正月에는 北兵使 李鎰이 渡江하여 時錢藩胡를 征討하고 왔으며 同年 3月 3日에 制勝方略을 施行할 것을 力請한 일이 있음으로서 알 수 있겠다.

다시 말하면 西水羅는 慶興郡에 속해 있는 우리나라 最北端의 漁港으로 雄基 北方에 位置하여 雄基灣에 臨해 있다. 北關誌 慶興關防에 西水羅堡는 府 南쪽 57里에 위치해 있으며 石築의 둘레는 1,209자 높이 11자에 兵卒은 60명이 있다고 기록해 있으니 本書와는 약간의 차이를 두고 있는 것이다.

造山堡 역시 慶興에 屬해 있는데 北距慶興35里와 南距 西水羅35里에 位置하고 있으니 現在慶興郡盧西面 부근이 아닌가한다.

이렇게 本書의 卷1, 卷2中에 수록되어 있는 列鎭防禦篇에는 守護, 各鎭形勢, 應變策, 烽燧, 體探, 伏兵, 望海, 部落, 邀撃處의 明示, 堡의 位置•城의 形勝, 故事鎭과 鎭의 距離明示, 堡의 所屬, 野人侵入狀況 및 防禦槪略 梁直 등이 자세히 記入해 있어 北邊 防禦 및 野人征討에는 最緊한 資料로서의 評價를 받을 수 있다.

3. 制勝要務의 槪略

卷2에 收錄된 「請行制勝方略狀」, 「軍務二十九條」, 「禁令二十七條」 및 「六鎭大分軍」, 「三邑(吉州.明川.鏡城)分軍」등은 그 內容上으로 보아 臨敵制變의 節次를 明示해 주고 있어 더욱 北方 經略과 開拓 防禦的인 力點을 窺視할 수 있게 하고 있다.

그 밖에도 本書에는 備局回關, 報巡營, 放糧式 및 跋文이 끝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軍務二十九條에 關係되는 項目에서는 다음과 같이 明示하여 制變에 대처하도록 督勵하고 있다.

『鏡明吉(鏡城•明川•吉州)三邑下番營軍士及, 各鎭堡下番恒防軍士等, 乙良六鎭生變, 則各其防所馳到變事, 預先知委爲有如可, 聞變即時, 以事知品官, 定率領將色吏一同, 押領不分晝夜, 交付受到付, 上使爲於營, 上成册一應雜色軍士, 分三運, 一運則使守城, 將領率守城, 二運則守令親領, 生變處登時, 馳援爲乎矣, 遲緩者, 依軍令施行事』(同書 卷之2, P.20)

라는 것으로 보면 우선 軍務二十九條 가운데 첫째로 손 꼽을 수 있는 것은 三邑(鏡城•明川• 吉州)을 지키는 軍士들이 生變을 當하게 되면 즉시 成册하고 三運으로 하여 野人의 不法的 侵入을 防禦해야 함을 闡明하고 있다. 이하 28條에 해당하는 各 條目 은 모두 生變에 대응하여 制變防禦할 수 있도록 注意를 喚起시키고 있다.

다시 同書 卷之二 P26에서는 禁令 27條를 나타내고 있는바 첫째 것을 보면

라는 것에서 禁令의 眞面目을 알 수 있으며 이와 같은 禁令은 以下 26個條로 構成되어 있는 것이다. 가령 간단한 禁令을 보면 (軍號不明, 亡其章表者罰) 한다는 것이다.

『怯者不可獨退, 勇者不可獨進, 一齊心力』

『行軍時, 絕驅則罰』

『軍中高聲唱號者罰』

이라는 등 軍律의 嚴酷함과 軍士들의 정신적 무장의 단련을 얼마나 철저히 시키고 있는가하는 것을 本書의 禁令27條를 읽어 봄으로써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또한 「六鎭大分軍」條에서 보면

先鋒將虞候

右衛將•穩城府使

左部將•柔遠僉使

前部將•永遠萬戶

中部將•府判官

遊軍將•府軍官

右部將•美錢僉使

後部將•黃拓坡權管

등등과 三邑分軍으로서는 先鋒將, 西北萬戶에 右衛將 明川縣監, 中衛將 吉州牧使, 左衛將, 富寧府使임을 알 수 있다.

끝으로 備局回關과 放糧式의 內容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나 지면 관계로 다 解題치 못하는 아쉬움을 간직하거니와 本書의 撰修야 말로 咸鏡北道의 國防史上 극히 重要한 防禦 및 開拓의 意義가 內包되어 있는 兵書中에서도 最要한 古典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李炫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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